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이명동

구술자소개

구술자
이명동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8월 30일
장소
서울 구술자의 자택
구술시간
1시간 35분 53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공유

구술내용 요약

지금은 은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카메라도 일체 들지 않는다. 성균관대에 간 것은 심산 김창숙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다.  심산의 둘째 아들이 구술자의 초등학교 동기다. 학교에 들어가서 총장인 심산의 비서 역할을 했다. 심산 편지를 전하러 38선 너머  철원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사진을 찍었다. 미군정 시절 농림부 산림국 치산치수 기록사진을 찍었고 김구, 조병옥 등 거물들의 생전 마지막  사진도 구술자가 찍었다. 심산의 먼 친척인 김창국 학생과장 덕에 6‧25 때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김 선생은 6‧25 때  북으로 갔다가 나중에 간첩으로 내려왔다 잡혀서 옥사했다. 국대안반대운동 때는 심산의 지시로 교내 좌익조직에 들어가 프락치 노릇도  했다.
1.4후퇴 때 대구 처가에 가 있다가 군부대 기록사진사로 종군했다. 해방정국과 6‧25전쟁 국면에서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다.  신문사에 들어간 것은 6‧25 후 실향민 소식지인 중앙일보(지금의 중앙일보와는 다름)에 발탁된 것이 계기가 됐다. 거기서 근무하다  동아일보 사주인 인촌 김성수 선생 빈소에 이승만 대통령이 문상하는 사진을 단독 촬영한 것이 인연이 돼서 동아일보로 옮겼다. 
1957년 정치깡패들의 장충단공원 테러 사건, 1958년 경북 영일을구 재선거 부정 현장을 찍었다. 이것들도 다 4‧19와 관련된 사건이다. 서민호의 옥중 사진은 야당 국회의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어렵게 찍은 특종이다.
4월 19일 경무대로 진격할 때 어린 학생들이 소방차 두 대에 시동을 걸자 자동적으로 사이렌이 켜졌다. 구술자는 이들이 죽으러  간다는 걸 알았다. 이들이 죽을 건데 소리를 지르고 죽는지 앞으로 넘어지는지 뒤로 넘어지는지 한번 보자, 이런 심정으로 이들을  따라가며 셔터를 눌렀다. 총소리가 나고 소방차에서 떨어진 학생한테 깔려 앞으로 넘어져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총은 맞지 않았고  카메라가 먼저 땅에 닿아 충격을 흡수해줘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카메라도 렌즈 부위가 찌그러졌지만 무사했다. 회사로 와서 쓸  만하면 쓰라며 카메라를 던져주었다.(경무대 앞 총격 장면을 담은 이 특종 사진은 계엄이 해제된 4월 26일에야 실렸다.)


5. 참고자료

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 ~ 1960년 4월 30일자
『월간조선』 2002년 3월호, '보도사진의 개척자 이명동'
이명동, 『보도사진 이론과 실제』, 해뜸, 1988년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이명동(기자,언론인)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4221KB

    Downl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