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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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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김진배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7월 29일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2시간 49분 4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4년 출생 1958년 경향신문 입사 1960년 4월혁명 당시 경향 신문 정치부 기자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딱 한 차례 도전해보고 실패하자 포기했다. 학창시절에 산악반을 만들어  낭가파르바트,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 해외 등정까지 했다. 좌익 책들은 많이 봤지만 협진회 같은 이념서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구술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경향신문에 공채 2기로 들어갔다. 고려대 선배인 송원영 정치부장의 눈에 띄어 사쓰마와리(경찰 출입  기자)를 안 거치고 정치부에서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 당시 고재호 대법관 집에 입주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인연으로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 차를 타고 출근했다. 그렇게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2개월도 안 돼 신문이 폐간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대통령  기자회견 오보, 성북서 간첩 검거 보도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육군 사단장 기름 빼돌린 사건 보도와 여적 필화사건이 빌미가  됐다. 그 때문에 법조 취재에 투입됐다. 폐간 공고문 붓글씨를 구술자가 썼다.
폐간 후 전북일보를 거쳐 세계통신에 근무하던 중에 4‧19를 맞았다.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 시위가 발생하던 날  대전 유세를 취재했다. 당시 언론사에서는 기자들을 대개 자기 연고 지역으로 보냈다. 대전에 갔을 때 임철호 국회부의장 등 자유당  최강경파 그룹과 함께 유성관광호텔에 묵었다. 아침에 임 부의장이 묵고 있는 스위트룸에 육군 소장인 하갑종 특무부대장과 논산  제2훈련소장이 찾아왔다. 임 부의장이 이들의 면담을 거절하다가 인사만 하고 가겠다며 재차 요청하자 면담을 허락했다. 하 소장이  "이기붕 부통령 후보 각하의 표도 대통령 각하의 표에 못지않게 많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가당한  일인가. 임 부의장은 "뭔 소리를 그렇게 해. 당선만 되면 되지. 결코 무리하지 말게"라며 나무랐다. 군도 부정선거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전 유세 취재에 이어 군산에 갔다. 윤보선 등 야당 의원들과 군산에서 제일 큰 희망여관에 갔는데, 경찰이 전부 예약을 해놔 방이  없었다. 여당은 공설운동장에서, 야당은 우시장에서 유세를 했다. 윤보선 의원이 트렁크에 토스터와 버너를 가지고 다녔다. 윤  의원이 "허, 김 기자, 보지 않았나? 저 사람들이 잠도 안 재워주고 밥도 안 줘"라고 말했다. 군산에 이어 전주 유세를  취재하면서 경찰이 단순히 이승만-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보다 두 후보의 득표율을 더 높게  만드는 일에 혈안이었다.
야당도 신‧구파가 적과 다름없을 정도로 분열돼 있었다. 야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나이가 많아 당선되더라도 임기를 다 못 채울 것으로  보았다. 민주당 구파는 신파인 장면 부통령 후보가 대통령을 승계하는 것을 배 아파 할 정도로 신‧구파 사이의 알력이 심했다. 
4월 18일 국회 기자실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가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고려대생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다. 돌아갈 때 깡패가  시위대를 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4월 19일에는 경무대 앞 총격 현장에 있었다. 군인인지 경찰인지 알 수 없지만 작업복 차림의  무장한 무리를 보았다. 이게 어떤 세력인지 규명돼야 한다. 국회 쪽에서 서울신문이 불타는 모습과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이  총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총에 맞아서 떨어졌는지, 단순히 놀라서 떨어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직접적인 이유는 김구 패거리가 경무대로 쳐들어온다는 정보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부정선거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지만 3‧15 선거 당일 마산에서 격렬하게 시위가 일어난 까닭은 야도인 마산에서 야당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이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 것과 마감 시간 이후 투표를 못 하게 한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도화선이 됐다. 4‧19에  대해 정확하게 규명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 기회가 닿으면 이런 작업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

5. 참고자료

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 ~ 4월 30일자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