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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윤환
면담자
민족문제연구소(장신, 이명숙)
구술일자
2010년 9월 28일
장소
민족문제연구소 회의실
구술시간
1시간 27분 5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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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해방 직전 경성경제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에서 6개월 가량 재학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고려대학교(당시 보성전문학교) 상대로 옮겨 재학했다. 재학 중 학생운동 등에도 적극 참여했다. 졸업 후 휘문고등학교에서 2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55년부터 고려대에서 시간강사를 시작해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서 강의했고, 1960년에 고려대 경제학과 전임강사를 맡았다.

1) 고대 강사로 재직 중이던 당시 사회분위기 및 대학분위기
6‧25전쟁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된 한국의 상황은 빈곤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과 북진통일을 위해 지속적으로 군비를 강화했고, 미국 등의 해외 원조는 구호물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은 극심한 실업난과 빈곤으로 경제 불안이 극에 달했다. 또 지나친 반공주의는 독재를 수반했고, 원조경제 하에서 원조물자를 둘러싼 정권 담당자들의 부정부패 또한 심각해 이승만 정권은 실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쟁 후 1950년대의 대학사회는 대부분의 교수들이 납북되어 교수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대학원을 갓 졸업한 경우에도 시간강사로 임용되었고, 또 전공과 관계없는 과목도 맡아 강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수사회 전반은 보수 성향이 강한 편이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도 일부 교수에 국한되었다. 
구술자는 강의 내용에 있어서 맑스 경제학과 근대경제학을 절충해 강의했고, 그러한 강의는 학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강의 내용 등에 대한 정부 당국의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지속적인 감시는 있었다고 한다. 직접 탄압을 하지 못한 이유로는 고대나 연대 등이 가지는 사회적 위상이 상당했기 때문에 그 대학에 재직 중인 교수(강사)를 직접 탄압하거나 체포할 경우 발생할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한편 대학생들은 교내에서 써클 등을 조직해 사회비판적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고려대의 경우 민통, 협진회와 같은 학생조직이 있었다. 특히 노사의 협력을 강조하는 개량주의적 성격을 가졌던 협진회의 경우 4‧19 당시 구술자가 지도교수를 맡고 있었다. 이 같은 학생 써클에 대해 학교 당국은 대부분 과격한 학생조직으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구술자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고 공개된 단체로 학교당국에 등록하게 했다고 한다.

2) 고대생들의 4‧18과 4‧19
3‧15 부정선거 이후 대학 및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를 연장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했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움직임은 별로 없었다. 4‧18 이전에는 주로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대학을 방문해 질책과 동의를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내 분위기는 협진회나 민통(민족통일연맹) 등의 활동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이승만 정권에 대해 반대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고, 또 일부는 무관심했다. 즉 3‧15 부정선거가 나쁘다는 인식은 있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행동이 없어서 교수나 학교 측에서도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대생들의 4‧18의거가 일어났다. 당일 학생들이 급박하게 모여 학교 밖으로 시위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일부 학교 당국자나 학생을 지도하는 교수들은 즉각적으로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시키려고도 했다. 하지만 고대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시내 곳곳에서 저녁까지 시위를 진행한 후 동대문 쪽으로 돌아오던 일부 시위대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19일, 이 사건에 격분해 전국적으로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촉발되었다. 그러나 고대생들은 전날의 시위로 인해 19일의 시위에는 대부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4‧18과 4‧19가 대학생 중심의 시위였기 때문에 학교 당국은 문교부의 여러 지시(문책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를 받고 이를 무마하기에 바빴다. 또 계엄령과 함께 학교에 군대가 배치됨과 동시에 학교도 휴교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대부분의 교수들은 시위학생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구술자는 4‧19때 광화문 등지에서 시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목격한 후 개인적으로 학생의 희생에 보답하는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 4‧25 교수단 시국선언과 시위
25일 어떤 교수가 모임에 가자고 했으나 그날 약속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고, 26일 오후에 다시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서울대 문리대로 갔다. 이날 이곳에서는 전날 모임에서 논의된 것들을 이야기하고 이어 데모하자는 의견에 따라 교수단 시위에 동참했다. 행진에 앞서 어떤 교수는 오늘 절대 발포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교수단의 시위행렬은 종로를 거쳐 지금의 시청 앞인 국회에 다다랐는데 이미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공간을 확보해 주어서 그 곳으로 교수단은 들어갔고, 이항녕 선생이 시국선언문을 읽었다. 이렇게 끝을 맺으니 주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는데, 당시 이 광경은 그야말로 시민, 학생, 교수 모두가 일체가 되었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대단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의 시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터에 다른 시위처럼 시위 후 도망가기 바쁜 것이 아니라, 시민‧학생들의 동조, 격려, 보호 속에서 당당하게 행진했던 것은 느끼는 바가 크게 달랐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시위는 결정타, 즉 학생들의 시위에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교수들이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5. 참고자료

《경향신문》 1962.4‧25, 「오늘 敎授'데모' 두 돌 經緯는 이렇다」
《동아일보》 1963.4‧25, 「革命의 巨樹 이룬 겨자씨 한 알 (6)敎授 '데모'」
《경향신문》 1964‧4‧25, 「敎授데모 秘話」
『民主革命의 발자취 : 全國各級學校 學生代表의 手記』, 李綱鉉 編, 正音社, 1960
『사월혁명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3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인, 2001.11
『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8
『4월혁명통사』, 홍영유, 도서출판천지창조, 2010.4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윤환(4.25교수단시위)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9068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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