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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윤

구술자소개

구술자
박용윤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8월 23일
장소
경기도 용인시 구술자 자택
구술시간
1시간 36분 4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일반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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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가 한양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것은 사람이 태어나서 언젠가는 가는 건데 뭔가 남기고 싶었고, 그것이 건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때 전방 참호에 미군 해병대가 버리고 간 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병사가  쓰러지는 사진인데, 건축보다 이런 사진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신문학원 사진학과를 나와서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들어갔다.
1960년 2월 12일 장택상 후보 등록 방해 테러사건 사진을 살벌한 가운데 단독으로 찍었다. 3‧15 선거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투표하는 사진을 찍었다. 회사로 가져왔더니 싣지 않았다. 전날 동아일보 기자가 폭력배한테 당한 데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사회면에 '공기총'이라는 칼럼을 쓰는 최호 사회부장이 '대통령 사진이고 뭐고 쓰지 말자'고 제안해서 그날 하루 신문이 사진 없이  먹판으로 나갔다.
4월 12일 민주당 경북도당 시위가 있다고 해서 대구에 갔다가 마산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산도립병원에 가서 태극기를  덮어놓은 김주열 시신을 찍었다. 이 사진과 최루탄이 박힌 모습을 그린 그래픽을 함께 지면에 내보내 충격이 더했다. 이 사진을 다른  외신 기자들도 함께 찍었는데 나와 달리 그들은 촬영 전에 망자에 대한 예의를 먼저 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기억이 강렬해서  나중에 '인간애 상'을 제정하게 되었다.
야간에 시위대가 불탄 경찰차 앞을 지나가는 사진이 AP통신을 타고 외신에 보도됐다. 플래시 밸브 10개를 받아 현장에 나갔다.  AP통신 진철수, 김천길 기자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걸 보고 구해준 일도 있다. 군중에게 '동아일보는 국내에서 제일이지만 세계에  나가면 아무도 모른다. AP통신은 세계에서 모르는 데가 없다'고 설득했다. 낮에 보았던 불탄 경찰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시위대가 나타나자 셔터를 눌렀다. 이 사진이 첫 외신을 탄 4월혁명 사진이다.
4‧19날에는 본사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갔다. 동래고등학생 시위 사진을 찍으려는데 경찰서 건물을 보고 순간적으로 지프에서  내렸다. 그때 총알이 날아와 구술자가 앉은 자리에 박혔다. 동아일보 차를 저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경찰이 차마 사람을 쏠 수는 없어  구술자가 내리자 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위협을 느끼고 금은방이 있는 집에 들어가 필름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내가 혹시 잡혀가면  부산지사에 필름을 전하도록 했다. 
부산 발포 현장에는 처음에 정복에 둥근 모자를 쓴 경찰이 있다가 어느 틈엔가 슬쩍 카키색 작업복에 군화를 신은 전투경찰로  바뀌었다. 부평에 있는 경찰전문학교 학생들이라고 했다. 지역 경찰은 자기 자식이나 친척, 동네 아이가 있으니까 차마 그들을 향해  총을 쏘지 못할 것이다. 전투경찰은 자기네와 상관없으니까 명령대로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산 취재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에 오니 세종로네거리에서 중앙청 앞까지 사람이 꽉 차 있었다. 4월 25일 대학교수단  데모를 유일하게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었다. 행진을 시작했을 때 재빨리 서울대 의과대학 정문의 문주 위에 올라갔다.  곧바로 한 컷을 누르고 나니 이미 선두가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 장면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 후 시민들이 계엄군 탱크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는 사진이 그해 6월 1일 발간한 『민주혁명의 기록』이라는 사진집 표지에 실렸다. 계엄사단장이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부르는 사진도 구술자가 찍었다.


5. 참고자료

동아일보 1960년 3월 1일 ~ 1960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사사 권2』(1945~1960), 동아일보사, 1978년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박용윤(기자,언론인)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3160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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