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부문
-
강기갑 구술자는 1951년생으로 사천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농민운동에 참여한 1세대라 할 수 있다. 사천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0년대 초부터 가톨릭에 입교하면서 가톨릭농민회 회원이 되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쌀생산비조사, 강제경작반대운동, 노풍피해보상운동, 을류농지세 개선운동, 농협민주화운동, 오원춘 사건 등 많은 활동에 헌신하였다. 농민으로서는 산지를 개간하고 젖소를 키워 원유를 생산하는 낙농가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그러나 강기갑은 농민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독재정권이 가하는 탄압으로 인해 개인의 낙농업 경영에 엄청난 부담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정권 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 결과 한때 수도사의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다시 농민운동으로 복귀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후반기에 농촌 총각의 결혼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그 책임을 맡기도 했다. 이 무렵에 한겨레신문 지국을 맡아 신문 보급에 힘을 쏟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이 결성된 이후에는 농민운동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의정활동에 몰두하여 많은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생업인 낙농업을 유지하기 어려워 불이익을 감수했다. 민주노동당에서 당 대표 등 중책을 맡아 활동했으나 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책임감으로 정계를 은퇴하여 현재 농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농민운동과 정당활동 과정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을 구술했다. 그는 농민운동가, 정치인으로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로 인한 가정적, 경제적 불이익으로 늘 갈등에 시달렸던 이면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내었다. -
강기훈성장과정과 대학시절, 민정당정치연수원 점거 투쟁으로 구속 그리고 재판 , 감옥 생활과 감옥에서 들은 6월항쟁 그리고 석방 즈음의 에피소드, 석방 이후 민중의 당 소속으로 치른 87년 대선과 88년 경남 남해 하동에서 선거운동하던 일, 이후 안양에서 노동운동 준비, 전민련에 들어오게 된 사연, 분신정국과 김기설 씨 분신 즈음 강기훈 씨의 행적 그리고 김기설 씨와 처음 만났을 때 회고
-
강신옥일제강점기 유년시절과 가정환경, 한국전쟁으로 영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사정, 고등학교 시절 링컨 전기를 읽고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는 과정, 서울대 법대 입학 후 사법고시, 행정고시 합격과 병역, 검사 시보를 거쳐 판사 시보로 있던 중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여 사표 제출, 1960년대 통혁당 사건부터 민청학련 사건까지의 변호사 생활, 민청학련 이후 시국사건 변호를 못하게 된 속사정, 10.26 사건 변호를 맡게 된 과정과 김재규 항소심 변호, 1980년대 시국사건 변호사로 활동, 정법회, 민변 활동과 국회의원 시절, 5공비리 청문회, 김구 선생 암살진상조사위원회
-
고은학창시절 친일파교장 배척,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과 활동, 국민연합 결성과정, YH사건, 문학인 101인 선언문 작성, 민주회복국민회의 가담 경위와 활동,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경위와 감옥에서의 상황, 1980년대 초반의 상황과 심정
-
권영길구술자는 1941년 일본에서 출생하여 해방과 함께 부모님의 고향인 경남 산청으로 이주했다. 부친은 해방 공간에서 변혁운동에 투신하셨고 6·25전쟁이 나자 산청군당의 간부였다가 9·28 이후 빨치산으로 입산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이 고초를 겪었고 구술자는 부산에 사는 숙부댁으로 가서 남부민초등학교를 다녔다. 남부민초등학교 시절 구술자는 인근의 쓰레기 하치장 주변에 모여 사는 불우한 아이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다. 구술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진학하는 부산의 경남중학교로 진학했고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 박빙의 차로 낙선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독서회 모임, 옥스퍼드라는 동아리 활동 등을 했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통해 나름대로 사상적 지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 시절에 구술자는 농민운동을 하기로 뜻을 세우고 김해로 현장조사를 하기도 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서울대 농대로 진학했다. 하지만 농대가 농업 연구자를 양성하는 곳임을 알고 자신의 선택이 적절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생활고도 겹쳐 1학년만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는 경기도 연천군에서 근무하면서 학보병으로 차별도 겪고 박정희의 심복이었던 윤필용의 위세를 보며 박정희가 처음부터 원대복귀할 의사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제대 후에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숙부에게 알리지 않고 부산에서 입시 과외교사를 하며 지내다 복학했다. 복학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신문기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대한일보에 입사했지만 회사가 너무 엉망이어서 곧 퇴사했다. 이 무렵에 결혼을 했고 구술자는 다시 서울신문사에 입사했다. 유신 선포를 전후하여 구술자는 기자생활을 하는 한편으로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한다. 뜻 맞는 친구들 그리고 당시 군인으로서 쿠데타을 꾀하던 사람들과 비밀히 연결되어 거사를 준비했으나 군사쿠데타의 방식으로 박정희를 제거하는 것이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판단으로 포기했다. 구술자는 1974년 8월 이른바 문세광 사건이 일어났던 장충체육관에서 기자로서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1970년대 말, 오래 꿈꾸던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구술자에게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로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기에 마땅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형식만 통신원 자격으로 갔으나 김형욱 사건이 일어나면서 서울신문의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파리에서 구술자는 프랑스의 자유로운 문화와 선진적 복지시스템을 경험한다.
그리고 6월항쟁 이후 귀국하면서 구술자는 막 태동하기 시작한 언론노조의 간부를 맡고 계속해서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언론노련, ILO 공대위, 전노대, 업종회의 등의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19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위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1996년 김영삼 정부가 날치기 통과시킨 노동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노동법이 개정되기는 했으나 보수 양당이 합의한 개정법은 너무 문제가 많았다. 이에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절감하고 199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다. 이후 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하여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가 되었다. 2002년과 2007년 대선에도 출마했고 창원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3선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수행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내의 분파 투쟁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점을 막지 못한데 대해 구술자는 통한의 심정을 술회했다. 이후 구술자는 건강이 악화되어 고생했으나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 구술자는 자신의 삶이 노동자, 민중을 위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분투해온 삶이라고 평가하면서 인류 앞에 닥쳐온 위기의 시대에 진보정치의 역할을 강조했다.
-
권오헌
권오헌은 1937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시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우수한 두뇌로 탁월한 성적을 보였지만 결국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바로 청소년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업을 계속하고 싶어서 잠시 상경하기도 했지만 급박한 가정형편으로 다시 귀향하고 결국 군에 입대하였다. 군 생활 중 정의감에 불타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지하조직을 만들어 적발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무사했고 이어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잡았다.
군 제대 후 잠시 충북 단양의 시멘트공장에 취업을 하기도 했지만 중장비 기사를 하면서 통일사회당에 입당했다. 이후 통일사회당 문화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했다. 이때 만난 임헌영 씨의 추천으로 1977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했다. 남민전은 1970년대 하반기 긴급조치 9호 등으로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유신독재의 폭압이 자행되던 상황에서 반외세 민족자주, 반독재 민주화를 내걸고 현장투쟁을 수행한 조직이었다.
구술자는 중장비 기사로 일하고 공개조직인 통일사회당 활동을 하면서 비공개 조직인 남민전활동을 병행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다. 결국 1979년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최종적으로 3년 4개월 옥고를 치른 끝에 만기출소했다. 구술자는 출소 후 구속자와 동료석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끝에 1988년 남민전사건 복역자 전원 석방을 성사시켰다. 이후 민가협양심수후원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비전향장기수를 전원 석방시켜 북으로 송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외에도 각종 사회민주화운동과 반전평화운동에 앞장섰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올바른 과거청산운동, 평택미군기지확장 반대운동 등을 하고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용산참사, 쌍용차문제, 천안함사건 진상규명, 제주해군기지 건설저지, 통합진보당 탄압 대응, 범민련남측본부 탄압 대응 등의 활동을 했다. 또 박근혜 정권 하에서도 세월호참사대책, 평양시민 김련희 씨 송환추진, 백남기 농민 사망대책, 사드배치 반대운동, 박근혜 퇴진운동 등에 관여했다. 구술자는 현재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으로서 열악한 건강상태에도 불구하고 양심수 석방, 사회민주화 및 반전평화운동에 온 힘을 쏟고 있다.
-
권호경성장과정, 도시빈민연구소의 설립과 활동, 필리핀 훈련 이야기, 시청 앞 시위사건과 광주대단지 사건, 수도권 조직 이야기, 청계천 답십리센터 이야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 선교자금 횡령 사건, 긴급조치 폐지 성명서 사건, 도시산업선교연합회 등 수도권 이야기, 민중교회, CO 운동정신과 교회
-
김병상성장과정과 가족사, 소신학교 생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과 활동,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데 영향을 준 메리놀선교회 성직자들, 인천교구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활동, 유신헌법철폐기도회사건, 구국사제단사건(대건회사건)과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유신의 종말에 대한 소회,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활동과 198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 활동, 목요회 활동과 주한교황청대사달걀세례사건
-
김상근일제 강점기 군산항의 미곡 반출 과정의 경험,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의 무릎 위에 앉았던 경험, 한독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정치적 지도력에 대한 존경심, 공과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과정, 4.19 때의 시위 경험과 학생회 총무로 활동하며 학생운동을 경험, 5.16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정리한 논문을 박정희에게 보냄, 6.3사태 때 김재준 선생의 가두시위와 그 실무를 맡게 된 이야기,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 역할을 해온 기독교운동, 시청료거부, CBS정상화, 선거보도감시 등의 언론운동, 6월항쟁 등의 민주화운동 지원금 마련과정, 투옥 경험이 없는 이유와 중단될 수 없는 투쟁, 후보단일화 실패후유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립과정,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에서의 활동과 최근 활동
-
김상근구술자는 1939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부터 약종상, 사업 등을 하면서 무교회주의 계통의 기독교를 믿었다. 해방 이후 부친은 미군정 하에서 적산을 관리하는 관재서장을 맡았으며 한독당 간부로도 활동했다. 6·25가 나자 인민군이 군산을 점령했고 부친은 피신하고 구술자 가족은 숨어다녀야 했다. 어린 구술자는 가족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 구술자의 부친은 결국 체포되었고 9·28수복 이후 근 한 달 만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구술자는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미군들이 시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상황들을 경험했지만 미군이 천사요, 해방군이라는 인식이 변하지는 않았다. 구술자는 모친의 권유로 부흥회에 나갔다가 다소 신비한 경험을 통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착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구술자는 김재준 목사의 책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한양공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결국 갈등 끝에 가출하여 한신대를 지원한다. 수석을 하여 학비를 면제받을 계획이었으나 차석에 그쳐 등록금, 생활비 마련에 고생하다 입시 과외자리를 얻어 버텨내었다. 4·19가 났을 때는 시위대를 따라다니는 정도였으나 이후 어용적인 학생조직을 깨뜨리고 학생회 총무를 맡았다. 졸업 후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문동환 목사님의 요청으로 수도교회 전도사를 하게 되었다. 수도교회에서는 문동환 목사님의 주도로 실험적이고 새로운 방식의 목회가 이루어지는데 매료되었다. 이후 문동환 목사님의 후임으로 수도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성직자 참관인단으로 영월에 파견되었던 경험도 있다. 유신체제 성립 이후 구술자는 NCC의 위원으로서 목요기도회를 통해 인권운동에 매진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선 씨 부인의 절규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목요기도회를 더 할 수 없었다. 1979년 10·26사건에 이르기까지 박정권과의 싸움이 계속되다가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일어났는데 서빙고 보안대로 끌려가 민주인사들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 이후 5·17쿠데타가 일어난 후 광주의 참극을 어떤 목사님의 전화로 알게 되었고 잠시 숨어다니다 스스로 예배를 집전한 후 연행되어 갔다. 구 전매청 건물에 만들어진 유치장에 갇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혐의로 조사받았으나 별다른 연관이 없어 방면되었다. 그 속에서 군인들이 교수들에게 폭행을 가해 사직서를 내도록 만드는 상황을 목격했다. 이후 1980년 가을에 기독교장로회 총회에 가서 광주학살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고 극우적인 인사가 부총회장에 피선되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했다. 구술자는 기장교단의 변화를 위해 박형규 목사와 함께 총회장과 총무를 교체하기로 하고 교단 목사들을 설득했다. 1981년 기장총회에서 박형규 목사가 총회장이 되고 1982년 구술자는 총무가 되었다. 1984년 구술자 NCC의 광주사태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아 활동했고 KBS시청료거부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에는 전면에 서지는 않았으나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맡아 조용히 운동을 뒷받침했다. 1987년 대선 국면에서는 후보단일화를 위해 박형규 목사님과 의논하여 김대중 후보에게 사퇴를 얘기했으나 설득되지 않았다. 1988년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노력하여 교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물로 88선언이 나왔는데 이것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성립 후 구술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으로 ‘제2건국위원회’ 일을 하게 되고,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끝으로 구술자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교육개혁, 공동체적 가치관의 정립, 한반도 평화정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김용준기독교운동과의 인연, 기독자교수협의회 참여, 고려대 기독학생회 지도교수, 3.1구국선언, 일본 와세다 대학 교환교수, 민청학련 사건, 교수 대량해직(2.28사건), 해직자교수협의회 설립과 활동, UB 이사 활동, 함석헌 선생님과의 인연
-
김정남성장과정, 삼선개헌 이야기, 민수협,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탄생 비화, 조선, 동아투위 해직기자들의 삶, 광주 민중항쟁 전후 활동, 6월 항쟁 관련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