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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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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김상근
면담자
차성환
구술일자
2022.7.15.(1차), 7.28.(2차), 7.29.(3차)
구술장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구술시간
528분

구술컬렉션 > 재야운동 > 부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39 전북 군산 출생  

1967-1982. 서울 기독교장로회 수도교회 전도사, 담임목사

1976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 

1985-199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시국대책회의 활동 및 위원장

1986-1987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활동

1994. 5․18특별법 제정 촉구 국민위원회 대표 

1995. 5․18학살자처벌 및 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 상임대표 

1996-1998.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1999. 기독교방송 이사

2000-2002.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위원장

2016.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비상시국대책회의 상임의장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1939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부터 약종상, 사업 등을 하면서 무교회주의 계통의 기독교를 믿었다. 해방 이후 부친은 미군정 하에서 적산을 관리하는 관재서장을 맡았으며 한독당 간부로도 활동했다. 6·25가 나자 인민군이 군산을 점령했고 부친은 피신하고 구술자 가족은 숨어다녀야 했다. 어린 구술자는 가족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 구술자의 부친은 결국 체포되었고 9·28수복 이후 근 한 달 만에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구술자는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다. 미군들이 시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상황들을 경험했지만 미군이 천사요, 해방군이라는 인식이 변하지는 않았다. 구술자는 모친의 권유로 부흥회에 나갔다가 다소 신비한 경험을 통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착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구술자는 김재준 목사의 책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한양공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결국 갈등 끝에 가출하여 한신대를 지원한다. 수석을 하여 학비를 면제받을 계획이었으나 차석에 그쳐 등록금, 생활비 마련에 고생하다 입시 과외자리를 얻어 버텨내었다. 4·19가 났을 때는 시위대를 따라다니는 정도였으나 이후 어용적인 학생조직을 깨뜨리고 학생회 총무를 맡았다. 졸업 후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문동환 목사님의 요청으로 수도교회 전도사를 하게 되었다. 수도교회에서는 문동환 목사님의 주도로 실험적이고 새로운 방식의 목회가 이루어지는데 매료되었다. 이후 문동환 목사님의 후임으로 수도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에는 성직자 참관인단으로 영월에 파견되었던 경험도 있다. 유신체제 성립 이후 구술자는 NCC의 위원으로서 목요기도회를 통해 인권운동에 매진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선 씨 부인의 절규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목요기도회를 더 할 수 없었다. 1979년 10·26사건에 이르기까지 박정권과의 싸움이 계속되다가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일어났는데 서빙고 보안대로 끌려가 민주인사들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 이후 5·17쿠데타가 일어난 후 광주의 참극을 어떤 목사님의 전화로 알게 되었고 잠시 숨어다니다 스스로 예배를 집전한 후 연행되어 갔다. 구 전매청 건물에 만들어진 유치장에 갇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혐의로 조사받았으나 별다른 연관이 없어 방면되었다. 그 속에서 군인들이 교수들에게 폭행을 가해 사직서를 내도록 만드는 상황을 목격했다. 이후 1980년 가을에 기독교장로회 총회에 가서 광주학살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고 극우적인 인사가 부총회장에 피선되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했다. 구술자는 기장교단의 변화를 위해 박형규 목사와 함께 총회장과 총무를 교체하기로 하고 교단 목사들을 설득했다. 1981년 기장총회에서 박형규 목사가 총회장이 되고 1982년 구술자는 총무가 되었다. 1984년 구술자 NCC의 광주사태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아 활동했고 KBS시청료거부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에는 전면에 서지는 않았으나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맡아 조용히 운동을 뒷받침했다. 1987년 대선 국면에서는 후보단일화를 위해 박형규 목사님과 의논하여 김대중 후보에게 사퇴를 얘기했으나 설득되지 않았다. 1988년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노력하여 교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물로 88선언이 나왔는데 이것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성립 후 구술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으로 ‘제2건국위원회’ 일을 하게 되고,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끝으로 구술자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교육개혁, 공동체적 가치관의 정립, 한반도 평화정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유신시대 사법살인으로 악명 높은 인혁당 인사 8명의 사형집행과 유족들의 심정을 증언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