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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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영
박시영은 1961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했다. 구술자는 빈번하게 이사를 다니며,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재학도 순탄하지 않았다. 외삼촌 노금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노금노는 1970년대부터 농민운동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시절부터 4H협의회 활동을 비롯해 함평지역 농민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지만, 연륜이 있는 다수의 사회운동가들과 일면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함평군협의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함평고구마사건에도 참여했다.
1979년 2월 학다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시로 올라와 전남연합회 사무실에서 총무를 맡고 있던 노금노를 돕는 한편,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맞았다. 5월 19일 북동성당에서 개최할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남농민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고, 어른들의 권유로 받고 함평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5월 22일 함평에서 결성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구술자는 전라남도 서부권을 돌며 시위를 벌이다가 5월 24일경 어렵사리 귀가했다.
1980년 8월경 전남연합회 광주분회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권유로 “광주미문화원방화”에 참여했다. 1980년 12월 9일 사건 현장에서 구술자는 윤종형과 망을 보았다. 구술자는 며칠 후 구속되었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81년 8월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구술자는 비록 충분하게 의식화되고, 의미를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에 합류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는 현장에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 사건 이후 구술자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면담 마지막 부분에서는 광주미문화원방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미 사망한 정순철과 김동혁에 대한 기억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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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형
윤종형은 1954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했다. 구술자는 1970년부터 약 7년 동안 이른바 ‘머슴’ 생활을 하여 논 7마지기를 구입했다. 1976년부터 군복무(제2국민역)를 하는 동안 4H연합회에 참여했다. 1977년 군복무를 마치자, 그의 성실성과 진실성에 공감한 동료들에 의해 함평군 4H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77년 4월 22일 함평고구마사건을 쟁점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소재 계림동성당에서 개최된 농민대회에 참가했다. 이 즈음에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함평군협의회 회원이 되었고, 열심히 활동했다. 1978년 크리스찬아카데미 1차 교육을 받았고, 1979년 함평군협의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79년 3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발발하던 날에 2차 교육을 받고 있었다.
농민운동에 헌신했던 구술자는 1980년 5월 광주 시내에서 발생한 집회와 시위를 목격했다. 구술자는 북동성당에서 19일 개최할 예정이던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남농민대회”에 참가 및 준비하기 위해 5월 18일 광주에 왔다가 부상을 당했다. 5월 19일 북동성당에 갔으나, 행사는 취소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 귀향했다.
구술자는 전남연합회 전 회장이었던 김동혁의 권유로 1980년 12월 9일 전개된 “광주미문화원방화”에 참여했다. 구술자는 경찰의 추적과 수배를 받게 되자 상경하여 세신사와 장사 등을 하며 수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에 광주미문화원방화의 중요 인물이었던 정순철이 도피하다가 체포되자 자수를 결심한다. 그는 1983년 4월 11일 천주교회의 도움을 받아 검찰에 입건되었고, 1984년 2월 4일 사법부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구술자는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적지 않았으나, 의로운 행동이었고, 사회적으로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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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수
임종수는 1959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출생했다. 1979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구술자의 대학 생활과 인식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학생이었다. 2학년 초에 학원자율화의 일환으로 총학생회가 구성되면서 박관현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비범하다는 인상을 갖게 했다. 임종수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 작전과 무수하게 생겨난 희생자들의 모습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해 여름 그가 속해 있던 KUSA(유네스코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습모임 결성을 시도했는데, 발각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8월 말경, 임종수는 김창중의 소개로 정순철과 김동혁을 만났다. 김창중은 임종수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학생은 아니었고, 가톨릭 관련 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술자는 이들과 함께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80년 12월 5일 개최된 ‘가농 추수감사제 및 농민대회’가 계획처럼 시위로 연결되지 않자,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의 부각과 정치·사회적 여론 환기를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2월 9일 김동혁, 정순철, 윤종형, 박시영과 광주미문화원방화를 결행하게 되었다. 이 일로 임종수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한 후, 1983년 6월 25일 출소했다. 임종수는 최후 변론에서 방화의 정당성을 강도 높게 주장하여 집행유예로 감형되지 않았다.
임종수는 출소 직후 5‧18민주화운동 상황극을 오디오 테이프로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1984년 3월 전남대학교에 복적이 되었고, 그해 8월 24일 복권되었다. 1986년 2월 졸업한 후, 전남지역의 사회운동단체에서 일하다, 1988년 상경하여 ≪엔터프라이즈≫에 취업했다. 취업 몇 달 만에 회사가 위장폐업을 했고, 구술자는 노조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항거했다. 이후 ‘해직언론인협의회’ 사무국장 등으로 일했고, 정치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95년 8월에 광주시 언론 담당 공무원이 되었고, 2019년 6월 30일 퇴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