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Embed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URL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이메일 공유
윤종형
사업개요
-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2차년도 과제인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구술채록은 1970년대 말부터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광주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이어지는 시국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건에 직접 가담한 5명 중 생존자 3명을 선정해 구술 자료를 수집하며, 방화 사건의 구체적인 실행 과정과 인물별 역할, 피해 현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사건 자체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하되 관련자들의 전후 삶과 활동 궤적을 함께 채록함으로써, 광주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지닌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생애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윤종형
- 면담자
- 정호기, 김경자
- 구술일자
- 2019.6.29
- 구술장소
- 전남 함평 구술자 자택
- 구술시간
- 169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5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
1968년 함평해보초등학교 졸업
1976년 4H협의회, 가톨릭농민회 가입. 이후 계속해서 농민운동
1979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함평군협의회 총무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참여
1980년 12. 9. 광주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참여. 도피. 1980. 12. 18. 기소중지
1983년 4. 11. 노금노, 윤공희 대주교 주선으로 자수, 불구속 재판(1984. 2. 4.,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특별사면(1984. 8. 14.), 천주교 입교(1983.)
1987년 평화민주당 가입,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국민의 당 등에서 정당 활동
1998~2002년 함평군의회 의원(해보면)
2019년 농업
- 구술내용 요약
-
윤종형은 1954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했다. 구술자는 1970년부터 약 7년 동안 이른바 ‘머슴’ 생활을 하여 논 7마지기를 구입했다. 1976년부터 군복무(제2국민역)를 하는 동안 4H연합회에 참여했다. 1977년 군복무를 마치자, 그의 성실성과 진실성에 공감한 동료들에 의해 함평군 4H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77년 4월 22일 함평고구마사건을 쟁점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소재 계림동성당에서 개최된 농민대회에 참가했다. 이 즈음에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함평군협의회 회원이 되었고, 열심히 활동했다. 1978년 크리스찬아카데미 1차 교육을 받았고, 1979년 함평군협의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79년 3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발발하던 날에 2차 교육을 받고 있었다.
농민운동에 헌신했던 구술자는 1980년 5월 광주 시내에서 발생한 집회와 시위를 목격했다. 구술자는 북동성당에서 19일 개최할 예정이던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남농민대회”에 참가 및 준비하기 위해 5월 18일 광주에 왔다가 부상을 당했다. 5월 19일 북동성당에 갔으나, 행사는 취소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 귀향했다.
구술자는 전남연합회 전 회장이었던 김동혁의 권유로 1980년 12월 9일 전개된 “광주미문화원방화”에 참여했다. 구술자는 경찰의 추적과 수배를 받게 되자 상경하여 세신사와 장사 등을 하며 수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에 광주미문화원방화의 중요 인물이었던 정순철이 도피하다가 체포되자 자수를 결심한다. 그는 1983년 4월 11일 천주교회의 도움을 받아 검찰에 입건되었고, 1984년 2월 4일 사법부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구술자는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이 적지 않았으나, 의로운 행동이었고, 사회적으로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광주미문화원방화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동기 그리고 인식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