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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영
사업개요
-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2차년도 과제인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구술채록은 1970년대 말부터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광주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이어지는 시국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사건에 직접 가담한 5명 중 생존자 3명을 선정해 구술 자료를 수집하며, 방화 사건의 구체적인 실행 과정과 인물별 역할, 피해 현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사건 자체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 하되 관련자들의 전후 삶과 활동 궤적을 함께 채록함으로써, 광주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지닌 역사적 맥락과 개인의 생애에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박시영
- 면담자
- 정호기, 김경자
- 구술일자
- 2019.6.30
- 구술장소
- 광주 5.18민중항쟁39주년기념행사위원회 사무실
- 구술시간
- 107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1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
1976년 가톨릭농민회 가입
1980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 가입 및 활동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참여
1980년 12. 9. 광주미문화원 방화에 참여
1981년 8. 석방(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1983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청년분과, 함평농민회, 함평동학100주년기념사업회, 함평민주단체협의회, 5·18구속부상자회 등
2014년∼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상임이사, 현 공동대표
2019년 현재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
- 구술내용 요약
-
박시영은 1961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출생했다. 구술자는 빈번하게 이사를 다니며, 어렵사리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재학도 순탄하지 않았다. 외삼촌 노금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노금노는 1970년대부터 농민운동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시절부터 4H협의회 활동을 비롯해 함평지역 농민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지만, 연륜이 있는 다수의 사회운동가들과 일면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함평군협의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함평고구마사건에도 참여했다.
1979년 2월 학다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시로 올라와 전남연합회 사무실에서 총무를 맡고 있던 노금노를 돕는 한편,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맞았다. 5월 19일 북동성당에서 개최할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남농민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고, 어른들의 권유로 받고 함평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5월 22일 함평에서 결성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구술자는 전라남도 서부권을 돌며 시위를 벌이다가 5월 24일경 어렵사리 귀가했다.
1980년 8월경 전남연합회 광주분회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권유로 “광주미문화원방화”에 참여했다. 1980년 12월 9일 사건 현장에서 구술자는 윤종형과 망을 보았다. 구술자는 며칠 후 구속되었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81년 8월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구술자는 비록 충분하게 의식화되고, 의미를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에 합류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는 현장에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 사건 이후 구술자는 평범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면담 마지막 부분에서는 광주미문화원방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미 사망한 정순철과 김동혁에 대한 기억을 회고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광주미문화원방화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동기 그리고 인식, 진행 과정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