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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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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갑
권순갑은 1955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973년 동대문구 면목동 언니 집으로 상경했다. 집 인근에 붙어있는 YH 공고문을 보고, 입사했다. YH는 전성기였으며, 이른바 ‘미용실’로 부서 배치되었다. 사장 진동희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충청도 출신의 여공들이 많았다. YH는 가발을 생산했는데, 100% 수출이었다. 상여금과 야근수당이 없었다.
YH 노동조합은 1975년 (5월 24일)에 결성되었다. 초반 노동조합 활동에 열심이었던 분들에 대한 기억은 없다. 최순영 지부장을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 보냈던 것은 기억이 난다. 1976년 대의원으로, 1977년 쟁의부장으로, 1978년 부지부장으로 참여했다. 1977년에 기숙사에 입사했는데, 매우 열악했다. YH 노동조합은 산업선교회, JOC와 관련이 없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은 노동조합 집행부가 거의 대부분 받았다. ‘세븐클럽’이 실존했는가 여부는 모르겠다. 사무장은 민경애가 결혼하면서 박태연으로 바뀌었다. 박태연과 친구여서 노동조합에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박태연은 매우 현명하고 업무를 잘 수행했다. YH는 최고 성장기에는 종업원이 4,000여 명이었다.
회사는 1977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공장을 이전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회사가 폐업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노동자들이 대거 사직했다. 이들은 다른 회사로 취업하기도 했으나, YH 근무 경력은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권순갑은 가발 샘플을 만드는 부서여서 사직을 면했다. 회사는 인천에 있던 봉제공장을 면목동으로 이전시켰고, YH의 주력 생산품은 가발에서 신사복으로 바뀌었다. 이 일을 위해 400여 명이 이동했는데, 모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1978년경 노동조합은 인근의 동일교회 야학을 매개로 소모임 활동을 하고, 연극 연습 등을 했다. 회사는 노동조합 간부들을 포섭하려 했으나, 한 명도 넘어가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매우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단결력이 높았다.
회사가 1979년 3월 29일 폐업을 공고할 무렵에는 종업원이 1,000여 명 가량이었다. 노동자들은 4월 13일부터 현장에서 2박 3일을 농성하며 타개책을 모색했다. 해결이 안 되자, 7월 30일부터 농성에 다시 들어갔다. 회사는 8월 7일 폐업공고를 발표했고, 10일까지 임금과 수당 그리고 퇴직금을 인수하라고 했다. 진압이 곧 시작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8월 9일 신민당사 농성에 들어갔다. 이 일은 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했던 황주석의 역할이 컸고, 이문영, 문동환, 고은, 인명진, 김영삼 총재 등이 지원했다. 권순갑은 농성장 외부에서 YH의 실정을 언론과 은행 그리고 단체 등에 알리는 일을 맡았다.
구술자는 숨어 지내다 10월 30일 연행되었고, 12월 말경에 석방되었다. 바로 고향 경찰서로 인계되어 감시를 받고 지냈다. 매년 김경숙 추모제를 지내왔는데, 현재는 여성노동계에서 담당하고 있다. ≪YH노동조합사≫의 실제 집필자는 고대 학생운동 출신자였던 천영초였다. YH 출신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되지 않았다. 1985년경 문익환 목사가 시무하던 한빛교회를 다녔는데, 여기에서 알게 된 윤여연을 통해 대동인쇄소에서 일했다. 윤여연이 민청련 사건으로 잠행함에 따라 사업체를 맡았다. 1986년 인천5·3사건에 배포될 유인물을 제작해 보내주고, 바로 연행되어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자, 바로 인쇄소를 폐업하고 1년 동안 숨어 지냈다. 1987년에 인쇄골목에서 동방기획을 개업하여 6월항쟁에 사용된 유인물을 엄청나게 인쇄했으나, 제대로 비용을 받지 못해 손실이 컸다. 노동조합 활동가들 가운데 기억나는 인물은 민경애, 김양호, 김은정, 장남수, 고영난, 설영란, 최순영, 정만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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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김연자는 1955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출생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집안일을 돕다가, 연기군 인근과 천안시 소재 가발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1972∼73년경 상경해 친척이 소개한 문래동 소재 서울통상에 입사했다. 관리자가 노동자를 폭행한 것을 보고 친구와 이직을 결심했다.
김연자는 1974년 남영나일론에 입사했다. 신용협동조합에 저축한 것을 계기로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인연을 맺었고, 각종 프로그램과 소모임에 참가했다. 구술자가 소속된 소모임은 ‘늘벗’으로, 남영나일론의 같은 라인 동료들이었다. 입사할 때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1,000여 명이 동시에 점심식사를 하여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정시 퇴근을 해본 적이 없고, 회사는 카드로 출퇴근을 관리했다. 7년 동안 근무했는데, 5년 동안은 여러 이유들을 대며 ‘시다’로 근무하게 했고, ‘미싱사’로 근무한 것은 2년이었다. 산업선교회에 다니면서 노동법과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다른 회사 노동조합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 각성하게 되었다.
1976년 어용노조 민주화가 실행되었다. 대의원대회(1976. 5. 15.)에서 지부장을 문창석에서 나주식으로 교체하고자 했다. 투표 결과 50대 50표가 나왔다. 산업선교회의 지원을 받았던 노동자들은 섬유노조를 대신해 참석한 방용석 지부장을 신뢰했는데, 정회 후 속개하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농성이 한 달 가량 계속되자, 노동조합 집행부에 3명이 들어가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이것은 기존 노조를 합법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1976년 11월 15일 이른바 ‘정전사건’으로 노사갈등이 격화되었다. 회사가 근무시간 변경을 시도하자, 노동자들은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회사 측에 의해 14명이 구타를 당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피해자를 연행했다. 이 일로 그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교육선전부장 이순정이 해고되었다.
1977년 3월에는 잔업거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정시 근무 후 잔업을 거부하자, 회사는 출근카드를 돌려주지 않아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5월에는 임금인상 투쟁이 발생했다. 양남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려다 11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았다. 구술자는 용케 연행을 면했으나,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 곤혹스러웠다. 11명은 YWCA 등이 주도한 불매운동 덕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노동자들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난입해 인명진 목사와 명노선 전도사를 폭행하고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다. 11명은 6월 24일 현장에 복귀해지만, 별도 관리되었고, 결혼한 사람들이 퇴직하면서 위축되었다. 1978년 3월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5개사 연합시위를 전개하다 6명이 구속되었다. 남영나일론에서는 진혜자가 옥살이를 했는데, 구술자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석방 이후 소식이 단절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사망 이후 1980년 5월 17일 이전까지는 노동자 교육을 강화하는데 활동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5월 17일 인명진 목사가 연행되면서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구심이 약화 및 해체되었다. 김연자 등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알리는 유인물을 회사에 비밀리 배포하기도 했다. 정화조치가 시작되자, 회사는 사직과 삼청교육대 입소 중에 선택하라고 했다. 구술자는 사직하고, 1981년 결혼했다. 이후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2008년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못 다한 공부를 했다. 노숙인 상담과 자원봉사,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등의 활동을 걸쳐 약 10년 전부터는 인천에서 결식아동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도시락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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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임
김은임은 1955년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형편상 진학하지 못하고 상경했다. 동대문구 장안동 소재 풍미제과에서 1년 간 근무했다. 1974년 6월 6일 삼성제약에 입사했다. 삼성제약은 계절 요인에 따라 근무환경이 달랐고, 임금은 보통수준이었다. 회장은 김영설인데, 약사회 초대 회장을 지낼 정도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1977년 방위성금 등을 납부하지 않는 등 정부에 미온적 협조로 세무조사 등을 받았고, 1977년부터 10년간 법정관리를 받았다. 근무 시간 이후 무보수 노동에 규칙적으로 동원되었고, 비자발적으로 야근이 이루어졌다. 삼성제약은 예상하는 것보다 위상상태가 좋지 않았다. 경조사 휴가도 없었다. 노조가 결성된 후에 유급휴가가 보장되었다. 급식도 열악했다.
1975년 5월 한국노총 화학노련의 홍보를 계기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했던 4인 가운데 지부장 후보는 신고필증이 나오기 전에 회사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3인은 다른 사업장들로 전출되었다. 회사는 사장 비서(김영남)를 내세워 어용노조를 만들었다. 약 1년 만에 김영남이 결혼하고 사직하면서, 지부장을 새로 선출하게 되었다. 회사는 김영순(김현진), 권오선 등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회유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총회를 휴회하고 개회하지 않았다. 조향자, 김명선 등도 주요 인물들이었다. 한편 1972년 정종애 등이 추석보너스 인상지급 요구투쟁을 했던 사안과 1974년 여름 상여금 관련 투쟁은 입사 이전과 직후여서 거의 기억이 없다. 김석자 등이 1972년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1971년 외자기업 한국화이자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 계기가 되어 화학노련 후원으로 제약회사들에서 노동조합이 대거 결성되었다. 1976년 8월 권오순이 지부장으로, 김영순은 부지부장으로, 정종애가 부녀부장에 선임되었다. 윤미숙은 간부가 되었다. 회사가 권오순이 학력을 속였다며 해고하자, 1977년 경 김영순이 정식으로 지부장이 되었고, 김은임이 부지부장이 되었다. 이 체제가 거의 그대로 1980년 정화조치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1977년 회사가 법정관리를 받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회사는 노조를 장악하기 위해 소모임을 결성했다. 삼성제약 노조는 산업선교회나 JOC와 인연이 없었다. 필요하면, 인근 대학들의 학생과 노동부문 전문가(단체)들로부터 직접 지원을 받았다. 따라서 다른 노조들에 비해 내부 구성원들의 결속력이 높았고, 이른바 노동문화의 수준도 높았다. 삼성제약 노동조합과 화학연맹의 관계도 비교적 좋았다.
1980년 임금투쟁은 3월에 마무리되어 당국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노보를 제작했는데, 1985년 빨갱이라고 탄압을 받았다. 김은임은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인맥도 중요했다. 한국노총이 1980년 9월 정화조치 대상자들을 하달하자 항의 방문했다. 12월에는 당국이 일제히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삼성제약에서는 지부장 김영순과 김은임이 합수5국으로 연행되어 약 2주간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다. 김영순은 정화조치의 대상자로, 김은임은 관련자로 조사를 받았다. 김영순은 지부장을 사퇴해야 했고, 김은임이 지부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김영순을 지도위원으로 선임해 노동조합 활동에는 영향이 없었다.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어렵게 전개했는데, 기대보다 낮은 수준에서 타결되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노고를 인정해주었다. 1990년 3월 12일 노동부 업무조사 거부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나, 해고되지는 않았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조합민주화실천위원회의 결성과 활동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화학연맹, 한국노총 조직국장, 한국노총 경기본부 여성국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전노협 참여 등의 권유도 있었지만, 한국노총 민주화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노동운동에서 급진주의나 편을 가르는 방식의 사고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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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철
김주철은 1955년 부산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기 원산에서 월남했고, 어머니는 서울 태생이었다. 아버지의 일생은 영화 “국제시장”과 흡사하다. 구술자의 가족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무렵에 상경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75년 중화동 소재 무궁화주식회사에 입사했다.
무궁화주식회사는 관련 분야에서 세 번째 업체였으며, 직접 고용 노동자는 당시 130∼140여 명이었고, 다른 공정은 외주로 해결했다. 입사한지 한 달 만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이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세 번 해산시켰을 만큼 노하우가 있었다. 1976년 1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분회장이 되었으나, 바로 박춘식으로 변경했고, 구술자는 조직부장이 되었다. 노동조합 초기 간부들은 버티지 못하고 곧 사직했는데, 이때 구술자는 총무부장이었다. 따라서 구술자가 분회장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다. 업무상 직책은 부기사였다.
1977년 5월 18일 분회장으로 정식 선출되었다. 그러나 4개월 만에 예상하지 못했던 입대 영장을 받았다. 노동조합은 산업선교회나 JOC와 연계되어 있지 않았다. 조합원이나 간부들이 이들 단체에서 교육을 받거나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노동조합 활동과 연계시키는 것은 차단했다. 개인적으로는 JOC가 더 합리적이고, 진실한 것 같았다. 사장 곽창호는 평양에서 남하한 기독교인으로 충장교회의 신자였다. 회사 내에 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독실했다. 부인 강응순이 회사를 실질적으로 관리했는데, 노동자들과 갈등이 심각했다. 특히 1980년 4월 16일에 강제예배사건으로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군 복무하는 동안 분회장을 부분회장 임봉식에게 위임했는데, 이 기간 동안 간부들이 많이 사직했다. 1년 6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려 했으나, 회사가 거부했다. 한 달에 걸친 복직투쟁으로 1월 15일 복귀해 기사의 업무를 맡았다. 구술자는 총회를 걸쳐 1978년 3월 2일 분회장으로 재 선출되었다. 전 분회장 임봉식은 현장에서 일하다 얼마 후 사직했다. 분회장이 된 다음 날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1979년 9월에는 상여금 인상 등을 쟁점으로 파업을 벌이고 15% 인상을 성취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시점에도 파업을 벌였다. 기숙사 사감의 행동도 노동자들의 지탄 대상이 되어 투쟁을 통해 바꾸었다. 1980년 5월에도 협상하여 6월 9일 단체협상을 체결했다.
신군부의 정화조치는 무궁화주식회사에도 밀려왔다. 구술자는 몇 차례 경고를 받다가 1980년 12월 8일경 서대문으로 연행되었다. 무궁화주식회사에서는 혼자 연행되었다. 구술자는 폭행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으나, 원하는 답에 수긍하지 않자 1981년 1월 6일 원주 소재 삼청교육대로 이첩되었다. 노동운동 분야에서 삼청교육대로 이첩된 사람은 임재수, 이기창 등 7∼8명이었다. 회사는 삼청교육대 입소한 다음 날 구술자를 해고했다. 대다수의 삼청교육대 입소자들이 그러했듯이, 그곳에서의 생활은 악몽이었다. 구술자는 1월 26일 석방되어 복직투쟁을 벌였으나,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패소하면서 중단했다. 2010년경 삼청교육대 관련 민사보상을 청구했는데, 현재에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무궁화주식회사는 1980년대 초반에 폐업했는데, 지가는 100배 이상 상승해 있었다. 수출만 전념하고, 국내시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삼청교육대 출소 이후 편직회사, 택시회사, 노동문제상담소를 걸쳐 현재는 외국계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사회 활동으로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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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헌
남상헌은 1937년 서울시 서대문구에서 출생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초기 이곳 일대에서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 대한 기억이 있다. 1950년 9월 27일 미군의 폭격으로 살던 집과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파손된 후, 대구, 평택, 원주 등에서 약 7년 동안 어려운 생활을 했다. 상경하여 연희동 일대에서 거주하다 해군에 지원 입대했다. 제대 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휘장업 공장의 직공으로 일했다.
구술자는 1964년 고려피혁에 입사했다. 이 무렵 고려피혁은 여행용 가죽 가방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가방 외부에 부착할 휘장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구술자는 고려피혁에서 휘장 관련 업무를 1년 동안 하다가, 공작부에서 기계를 수리하는 업무를 했다. 노동조합 사무장의 권유로 조합원에 가입한 구술자는 부분회장을 걸쳐 1년여 만에 분회장이 되었다. 이후 1980년 정화조치에 의해 해고될 때까지 12년 동안 전국화학노동조합 서울지역지부 분회장을 맡았다.
고려피혁은 사장의 오판과 과욕으로 부도를 맞았다. 임금이 체불되어 1970년 7월경 단식농성을 전개했는데,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고려피혁은 1972년 ㈜대우에 인수되었다. 이때의 주요 쟁점은 고용승계와 퇴직금 누진제의 지속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초반에는 유연한 노사관리를 했으나, 곧 노조의 해체와 약화를 위한 다양한 작업과 조치를 취했다. 구술자는 노동자들의 협조와 노력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구술자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가 운영하는 교육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소속 연구원들과 인연을 맺었다. 또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도 참여하여 사례연구회 회장을 맡는 등 대외 활동도 열심히 했다. 이로 인해 한국노총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1980년 3월 김우중 회장 집을 항의 방문했다. 5월경에는 농성을 하다 17일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활동을 정리했다. 그해 9월 17일 한국노총이 소집한 분회장 교육을 받던 중, 일방적으로 귀가조치를 통보받았는데, 그것이 이른바 노동계 사회정화조치의 시작이었다. 구술자는 병가를 내고 항거했으나, 12월 31일자로 해고되었다. 구술자는 출근투쟁을 벌이다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구술자는 고려피혁의 유일한 해고자였다. 이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비롯해 다양한 노동관련 단체와 정당에서 중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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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헌
이 면담은 2018년 7월에 실시한 구술채록 내용의 수정, 보완과 추가를 위해 구술자의 요구로 이루어졌다. 먼저 수정할 사항은 출생지가 서울시 서대문구 영천동 184번지이며, 금화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어서 1964년 고려피혁에 입사하고, 1966년 부분회장이 되었으며, 1967년 분회장에 선임되었다고 정리했다. 구술자가 노동조합 분회장으로 선출되자, 회사는 노동조합 지원비 지급을 중단했다. 이 위기는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조합비를 인상하는데 승인하여 극복했다.
전 분회장은 권창호였고, 서울지역 지부장은 서울미원 오희철이었다. 오희철은 7년 연상이었고, 인품이 좋았으며, 유대가 깊었다. 그는 구술자의 권유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으며, 2∼3달 만에 조합원의 수를 900명 선에서 1,800여 명으로 확장하여 회사와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는 얼마 후 사직했으며, 몇 년 후 암으로 사망했다.
고려피혁은 1972년 대우에 인수되었다. 노동조합은 유니온 샾은 아니었으나, 노동자가 100% 가입했다. 인수되기 전에 두 차례 부도가 발생했고, 1971년 3월에 임금이 체불되었다. 조합원 전원이 단식농성을 전개하여 수령했다. 인수 과정에서 쟁점은 퇴직금 정산과 고용 승계였다. 화학노조와의 관계는 원활하여 극빈 조합원에게 원조물자로 제공된 밀가루를 공급했다. 고려피혁의 임금은 인근 사업장들과 비교할 때, 양호한 편이었다. 고려피혁의 경영이 악화된 주요 이유는 잘못된 예측으로 원자재를 대량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노조의 위기는 여러 차례가 있었는데, 1973년 12월 사무실 공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그 하나였다. 노조는 1974년부터 공제회를 운영하여 노동자를 상대로 한 회사 간부들의 불공정 대부 행위를 차단하고자 했다. 노동조합의 성과에는 ‘장화수당’을 빼놓을 수 없다. 노동조합은 수해 지원이나 경조사 등을 통해 조합원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회사 측은 조합원들을 매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고려피혁은 업종의 특성상 유해 작업장이었으나, 가톨릭대학 교수들이 주관한 조사에서 무해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고려피혁은 ‘쌍 매표’를 상징으로 달았다. 대전피혁과 고려피혁이 경쟁했는데, 고려피혁이 생산량의 측면에서 앞섰다. 서울대 화공과 출신들이 취업해 생산 관리를 주관하기도 했으나, 현장 숙련자들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피혁은 그 시대의 다른 사업장들과 달리 남성 노동자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의견 수렴과 활동 방향 정립이 지체되었다. 고려피혁은 산업선교회나 JOC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 분야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기는 했으나, 조직적인 연계는 없었다.
1975년 5월 13일 크리스찬아카데미 사례연구회가 발족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해산할 때까지 연임했다. 회사는 물론 화학노조로부터도 사퇴 압력을 받았다. 정보과는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1979년 2월 임금협상에서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용인공장이 먼저 타결하여 진행이 참으로 어려웠다. 1979년 5월 용인지부와 노동조합 통합이 이루어졌는데, 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겼다.
1980년 9월 17일 한국노총 안양교육원에서 노조 간부 교육을 받다가 노동계 정화조치 대상자로 통보받았다. 남화전자, 반도상사 조금분 등도 대상자였다. 기존 활동도 문제였지만, 1980년 3월 27일을 전후해 임금인상을 쟁점으로 단식농성 등을 전개한 것이 중요했다. 이때 한국노총 오승용 부장이 수차례 다녀갔고, 3월 29일에는 대우 사장 자택을 항의 방문했다. 4월 20일 유니온 마그네틱 지원 투쟁 과정에서는 아찔한 부상을 당했다. 5월 13일 개최된 한국노총 궐기대회에는 조합원 150여 명이 참가했다. 1980년 12월 30일 회사로부터 정식 해고되었다. 추가 구술은 1980년 정화조치 이후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으나, 예정과 달리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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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희박순희는 1947년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출생했으며, 성장기까지 이 일대에서 생활했다. 중학교 졸업 후 더 진학을 하지 않고 이웃에 거주하는 학성모직 상무의 급사로 취업해 현장 기술을 익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열심히 다니던 성당에서 소속감을 상실하면서 냉담자가 된다. 학성모직에서 배운 직포 기술을 바탕으로 1965년 대한모방에 취업한다.
대한모방에서 만난 동료의 주선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소모임 잔다크에서 활동하며 투사선서를 하고, 가톨릭노동청년회 서기를 거쳐, 남부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4개 사업장을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무렵 수녀가 되기 위해 준비를 했다가 수해를 당하는 것과 도요안 신부의 설득으로 수녀의 길을 포기하고 노동사목의 길을 걷게 된다.
가톨릭노동청년회 남부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사업장의 민주노조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던 중 원퐁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의 지부장 지동진이 사내 문제로 입원하자 병문안을 갔다가 노조원으로 입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공동체와의 상의 끝에 간부를 맡지 않는 조건으로 입사하게 된다. 입사 후 곧 대의원에 선출되고, 방용석 지부장의 구속으로 부지부장의 역할을 맡아 원풍모방 민주노조의 간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조장과 반장의 순환보직을 실시하는 등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원풍모방에 민주노조의 토대를 다지고, 왕언니로 불리며 조합원들과 연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방용석 지부장의 석방투쟁 등 수차례 원풍노조의 투쟁을 주도하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받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부지부장에서 현장으로 복귀 한다. 10.26 사건이 일어나고 서울의 봄이 다가오면서 노조 상근 부지부장으로 다시 돌아와 활동하던 중 5.17 비상계엄 상황에서 수배되고, 광주모금운동 등을 전개한 것으로 이유로 정화조치 대상자로 지목되어 다른 노조간부들과 함께 해고 된다. 유니온 샾의 특성상 해고 후 제3자 개입금지 대상자가 되어 수배생활을 한다. 지학순 주교의 주선으로 출두를 하게 되고 출두를 한 이후 조사과정에서 공안당국의 협박과 회유를 경험한다.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정화조치의 과정에서도 노조가 와해되지 않는 유일한 사업장이었지만 노조간부 중 4명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고, 다수가 구속되는 피해를 입는다. 출소 후 국제그룹의 양정모 회장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상태에서 원풍모방과 원풍타이어의 통합시도가 있었으나 이를 잘 극복하고, 이 과정에서 조합비를 노조원들에게 분배하고, 재모금하는 과정을 거쳐 나중에 원풍집을 마련하게 된다. 모금액을 지학순 주교에게 맡여 두었다가 도곡동 아파트를 구입해 노조지도부가 도피생활을 하던 중 아지트가 노출되고, 전원 연행되어 구속된다. 출소 후에도 이리 노동사목 활동을 하는 등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지속한다.
1차 구술을 마친 후 구술자는 중요한 이야기를 빠뜨렸다고 다시 추가 구술을 요청하였다. 구술자가 미리 요청한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당시 조사를 받게 된 과정과 조사내용, 공안당국의 위협에 대한 내용과 동일방직, 반도상사, YH와 원풍모방 노조원들의 최초 연대투쟁 과정을 중심으로 2차 구술을 진행했다. 구술자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과 관련하여 교육을 받은 민주노조 간부들 중 유일하게 연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퇴근하면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공안당국의 협박과 회유가 계속되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구술되었다.
구술자는 정화조치로 해직된 후 노조원의 지위를 상실해 제3자개입금지로 구속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최근까지 트라우마의 피해가 이어지는 경험을 했고, 당시 조사하는 분위기, 조사받던 방의 구조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술했다. 최근 경험한 트라우마의 원인이 당시의 조사과정에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로 고생하고 있는 것과 초보적 단계나마 치유가 시작되었고 성과가 나타나고 있음을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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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육남
박육남은 1960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했다. 6자매가 성장하는 동안 가정 형편이 어려워 오류여중 3학년을 마칠 무렵 학교와 결연을 맺고 있던 한일도루코에 입사했다.
1976년 12월 입사한 한일도루코는 남녀 기숙사에 약 7-800명이 기숙사 생활을 할 정도의 규모였다. 한일도루코는 1976년 당시 노동조합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으나 사측의 회유로 신고필증만 있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다. 1977년부터 노동조합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1978년 조합원 총회를 거쳐 민주노조가 재건된다. 당시 분회장으로 김문수가 선출되었다. 당시 김문수 분회장은 현장 순회도 자주하면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등 분회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1977년 노동조합 재건 운동 당시 검사반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직접 받아다 주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78년 노동조합 조사통계부원으로 시작해서 회계감사가 되고, 1980년 노동조합 부위원장이 된다. 1980년 2월에는 김문수 분회장이 불온서적 등의 문제로 도피를 하게 되고, 구술자를 포함한 노조 핵심간부들이 치안본부에서 분회장의 위치를 알려 달라는 추궁을 받기도 했다. 1980년 3월에는 김문수 분회장을 비롯해 구술자 등 3인이 해고되었으나 5월에 복직되기도 했다. 노동계 정화조치가 한창 시작되던 1980년 8월 분회장은 사직서를 내고 도피했으나, 구술자를 비롯한 4인의 핵심 노조 간부들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어 22일에 걸친 강압적 조사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폭행이 행해졌으며, 강압에 의한 사직서 제출을 종용받았다.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고, 회사에는 해직된다.
구술자는 1980년 12월 하순 합동수사본부 조사 후 한일도루코 사업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출근투쟁을 했으나 현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회사 주변에서 리어커 행상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만났고, 약 10여명의 학습팀을 조직하여 노동조합 재건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도록 기여했다. 1981년부터 구로공단 등 몇몇 사업장에 취업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블랙리스트로 인해 전부 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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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환
이광환은 1940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독자로 출생했다. 1960년 중앙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하여 4·19혁명에 참여했다.
1968년 동방모방에서 일하던 친구 동생의 소개로 입사하여 인력관리와 제품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2∼3년 동안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켜봤는데,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분회장 김영한은 섬유노조 서울지역 지부장을 겸했다. 1971년 김영한이 분회 선거에 재출마하자, 이광환도 경쟁자로 출마했다. 김영한은 섬유노조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경력자였으나, 이광환이 당선되었다. 이광환은 분회를 지부로 승격시켰으며, 조합원 교육에 주력했다. 신인령, 백재봉, 임종률, 방용석, 이원보, 김승호, 이목희 등을 강사로 초빙해 의식화 교육을 했다. 동방모방은 산업선교회나 JOC와는 관련이 없었다.
1976년 섬유노조 위원장으로 김영태가 선출되었다. 이광환은 조사통계국장에 임명되었다. 동광모방 노동조합 부위원장은 이광자였고, 윤묘중, 이견구, 장재환, 이금단 등이 간부들이었다. 이광환이 본조에서 근무하던 기간 동안 동방모방의 상황은 안순분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이광환은 1978년 섬유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김영태의 행위가 부적절했음을 지적했으며, 이유복 부위원장과 사법부에 제소했다. 이 일로 인해 이광환은 1979년 조사통계국장에서 해임되었고, 재판에서 패소했다. 1978년에 발생한 동일방직 사건을 섬유노조 책임자 자격으로 수습했으며, 1979년 8월 9일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사건 현장에 있었다.
1979년 12월 19일 동광모방이 누전에 의한 화재로 폐업했다. 회사는 이전부터 폐업을 시도했고, 노동조합은 이를 거부 및 차단했는데, 결과적으로 화재로 종결되었다. 이광환과 노조 간부 일부는 가리봉동 5거리에 공단서점을 개업하여 운영했다. 공단서점은 노동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연결 장소이자 지식 공급처로 기능했다.
1980년 사회정화 국면에는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원광모방은 폐업했으나, 섬유노조에서 간부로 활동한 것과 공단서점 개점 및 운영이 문제가 되었다. 중앙정보부 요원의 적극적 변론으로 삼청교육대로 이첩되지 않고, 풀려났다. ‘씨브라더즈’ 지원을 비롯해 노동자를 교육하는 활동을 했다. 1988년 박종근이 한국노총 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정치국장으로 선임되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동계의 몫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선출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정보당국에 의해 중단되었다. 1998년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으로 퇴임했다. 바로 이어 한국산업인력공단 본부장으로 부임했다가 2000년에 정년퇴임했다. 섬유노조와 한국노총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위원장들과 동료들의 성향과 주요 성과들을 간략하게 회고했다. 노동절 기념일 변경과 노동조합 정치활동 허용을 가장 큰 성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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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우
이봉우는 1958년 충청남도에서 출생했다. 1973년 상경해 오빠들이 거주하던 구로역 일대에서 생활했다. 협진양행에 2달간 취업했다가, 같은 집에서 세를 살던 언니의 소개로 미국 마텔사의 한국 하청기업인 대협에 취업했다. 마텔사는 바비 인형을 생산했다. 마텔사는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1979년경 철수했다. 이봉우는 직전에 해고되었다. 마지막 미지급 임금을 어머니가 노동부에까지 항의하여 받았다. 대협은 안광수 목사가 주도한 경수도시산업선교회와 긴밀했다. 이봉우도 산업선교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두 차례 노사협의회 위원을 역임했다. 이봉우는 안 목사가 노동조합 보다 노사협의회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의구심을 가졌고, 점차 소원해졌다. 회사는 10여 명을 해고시키려 했는데, 이봉우가 도시산업선교회와 멀어지자 타깃으로 삼았다. 이봉우는 1978년 6월 친구였던 한성순과 해고되었다. 해고는 회사와 도시산업선교회가 협상하여 2명에서 멈추었다. 안광수는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연계시키지 않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와 경쟁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협에서 해고된 후 유니전, 효성물산, 남영나일론 등에 취업하려 했으나, 블랙리스트에 수록되어 불가능했다. 이 무렵에 야학을 하던 이태복 등을 만났다. 운이 좋게 한국음향에 취업했으나, 남부서와 노동부에 포착되어 중단했다. 얼마 후 신생기업이었던 남화전자에 입사했다. 한성순도 남화전자에 입사했다. 회사는 3개월 만에 이봉우의 실체를 파악했다. 남화전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때는 조명자의 도움을 받았다. 조명자는 광민사 출판사와 냉동학원을 운영하던 장명국 라인이었다.
남화전자는 이봉우를 회유하기 위해 QC부서에 배치했다. 회사는 길기배를 노동조합 분회장으로 선출하려 했다. 화학노조는 노조 결성의 지원자로 이기붕을 세웠는데, 계엄령이 해제된 후 결성하자고 미뤘다. 상황이 녹녹치 않자, 회사는 1980년 1월 15일 연합노조로 산하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봉우 일행은 조명자의 조언을 받아 노조 탈퇴운동을 했다. 이봉우는 해고되었다가, 항거로 복직되었다. 회사가 노동조합 운영의 주도권을 넘겨 3월 25일 배복자를 분회장으로, 부분회장으로 이봉우와 이귀남을 선출했다. 배복자는 조만간 사직할 예정이었다. 한성순은 결혼하면서 사직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은 김귀균(김세균 동생), 정강자(최영희 이대 후배) 등이었다.
5·18민주화운동 국면은 조심스럽게 넘어갔다. 이봉우는 198년 7월 28일 분회장이 되었다. 노조는 체불임금을 쟁점으로 단체행동을 벌였고, 당국의 감시가 계속되었다. 이 무렵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1년 2개월 동안 입원했다. 정화조치 국면에는 장명국의 권유로 잠행했다가, 다른 회사들의 노조 간부들이 풀려난 것을 보고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는 12일 간의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했다. 남화전자는 기술 낙후로 1981년 5월에 폐업했다. 회사는 폐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강제로 지급했다.
이후 이봉우는 인천 소재 이성전자, 성화섬유 등에 취업했다가 해고되었다. 1985년 민한당사 점거농성에 참여했다가 구류를 선고받았다. 그해 8월 서울노동운동연합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수배를 받게 되었고, 1986년 4월에 연행되어 1987년 6월에 석방되었다. 그해 11월 13일 설립된 구로노동상담소 소장을 지냈다. 1987년 범한전기 노동조합 등을 지원했다가 3자 개입 위반으로 10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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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
이숙희는 1953년 경기도 인천에서 출생했다. 969년 신당동에 거주할 때 주위의 소개로 평화시장 은마차에 미싱 시다로 취업했다. 평화시장은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환경의 대명사였다. 헌신적으로 일한 은마차에서 임금인상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핀잔을 받았고, 계림사로 이직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호기심에 노동조합을 방문한 적은 있었으나, 긍정적인 인상을 받지 못했다. 1972년 노동조합 야유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해에 노동조합 대의원과 운영위원이 되었다. 아카시아 소모임에 참여했고, 나중에 회장이 되었다. 이후 1980년까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다양한 운동과 사건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노동교실 개관식 사건, 시다월급 정상화 투쟁, 전태일 추모의 밤, 1976년 9·9노동교실 투쟁,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이다. 노동조합은 내적으로 갈등이 적지 않았고, 구성원들 사이에 입장 차이와 반목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노동조합 간부를 사직하고 현장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었으며, 구속되기도 했다.
1980년 결혼과 함께 생계에 전념하게 되었으나, 남편은 노동운동을 계속하여 뒷바라지해야 했다. 노동계 정화조치의 파고는 육아로 모면했다. 주위 사람들은 연행되어 약 13일 동안 구금되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사건화 할 수 있는 자산도, 운영의 문제도 없었다. 1980년 아프리 점거농성과 관련하여 구속자 가족 모임을 결성 운영했는데, 이 활동으로 구류처분을 받았다. ≪청계 내 청춘≫은 수정을 했으나, 문제가 있다. 다른 책들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다. 청계피복노동조합에 대한 새로운 책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당시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이 청계동우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전태일재단이 잘 운영되고 자리를 잡아 정신을 계승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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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
이승철은 1949년 전라남도 나주군에서 출생했다. 구술자의 면담에서 자주 등장하는 최종인은 친척으로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고, 현재까지도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 이승철은 1966년 상경하여 인쇄소에서 일하다가, 1967년부터 최종인의 소개로 평화시장에서 일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 기술을 일찍 습득했고, 숙련공으로 대우받았다.
1970년 봄 최종인의 소개로 전태일을 만났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언론사를 찾아 호소하는 등 고투하고 있었다. 이후 최종인과 구술자 그리고 임현재 등은 전태일을 중심으로 ‘삼동친목회’를 결성하여 우의를 다졌다. 이들은 1970년 10월 23일 시위를 준비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1월 13일 재차 시위를 준비했는데, 전태일이 분신했다. 11월 18일 전태일의 장례식이 개최되었고, 이를 계기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구술자와 동료들은 제1대, 제2대 지부장은 외부 인사를 선출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사임하거나 사임할 것을 강제했다. 노동조합은 매우 힘들고 어렵게 운영되었는데, 구술자가 상임간부로 참여한 것은 제3대 최종인 지부장 체제에서 사무장에 임명되면서였다. 노동조합은 JOC 정인숙이 부녀부장으로 부임하면서 소모임 등을 통해 활성화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화되었다. 최종인, 이승철, 임현재는 이소선의 집에 함께 기거하면서 청계노동조합을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구술자는 1976년 4월 16일 청계노동조합 지부장에 선출되었으나, 1977년 6월 27일 사임했다. 지부장의 선출과 사임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발생했는데, 여기에는 노동조합의 운영과 활동에 대한 이해와 관점의 차이 그리고 청계노동조합 주변에 있던 학생운동 출신가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소선과의 의견 차이도 있었고, 양승조와 민종덕 등과의 입장 차이도 있었다. 구술자는 노동조합 운영 이외에도 주요 사건들에 대해 구술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노동교실 개관식 사건, 와이셔츠공단 가동 중단 사건, 1976년 9·9노동교실 투쟁,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을 들 수 있다.
신군부 집권기였던 1980년 초에 농성사건이 있었으나, 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2월 노동계에 대한 정화조치가 이루어지면, 구술자 등은 당국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청계노동조합 관련자들은 문제를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 2주 후에 석방되었다. 1981년 1월 6일 노동조합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항거의 일환으로 1월 30일 아프리 점거농성사건이 발생했다. 구술자는 점거농성사건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연행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석방된 이후 2년 1개월 간 공장에서 일하다가 1984년 1월 10일부터 지퍼 대리점을 시작했고, 현재에도 이를 계속하고 있다.
전태일 정신의 계승 방법과 활동 방식 그리고 기억을 두고 입장과 관점의 대립이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었고, 전태일재단을 비롯해 여러 가지 사업들에서 상충하고 있다. 전태일 친구로 산다는 것의 고뇌와 무게는 상당하다. 앞으로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데, 전태일의 초기 친구들은 이소선과 청계노동조합의 명예와 뜻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