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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철
사업개요
-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2차년도 과제인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결성 경위와 활동 성과를 파악하고, 1980년 신군부가 단행한 ‘정화조치’의 실상을 관련자 구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자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지원 조직의 활동 및 삶을 고찰함으로써 기존 생산된 자료나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5·17 이후 정화조치가 각 사업장에서 작동한 방식과 그 구체적인 피해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과거의 활동이 당사자들의 이후 생애와 인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70~80년대 노동운동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하고 관련 사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김주철
- 면담자
- 이영재, 정호기
- 구술일자
- 2019. 7. 8
- 구술장소
- 4.9통일평화재단
- 구술시간
- 149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5. 부산 출생
1975. ㈜ 무궁화 생산직(편직부 부기사) 입사
1976. 1. 전국섬유노조 서울지역지부 무궁화주식회사 분회 결성 주도, 총무부장
1977. 3. 15 노동조합 분회장 직무대리, 분회장 선출(5월)
1977. 9. 군입대
1979. 3. 30 군 복무후 재입사(1월), 노동조합 분회장 선출
1980. 12. 노동계 정화조치, 합동수사반 연행
1981. 1. 원주 소재 삼청교육대 순화교육, 해고
2001. 천주교 남부노동문제상담소 소장
현재. 휴먼파워컨설팅 협동조합 이사장
- 구술내용 요약
-
김주철은 1955년 부산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기 원산에서 월남했고, 어머니는 서울 태생이었다. 아버지의 일생은 영화 “국제시장”과 흡사하다. 구술자의 가족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무렵에 상경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75년 중화동 소재 무궁화주식회사에 입사했다.
무궁화주식회사는 관련 분야에서 세 번째 업체였으며, 직접 고용 노동자는 당시 130∼140여 명이었고, 다른 공정은 외주로 해결했다. 입사한지 한 달 만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이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세 번 해산시켰을 만큼 노하우가 있었다. 1976년 1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분회장이 되었으나, 바로 박춘식으로 변경했고, 구술자는 조직부장이 되었다. 노동조합 초기 간부들은 버티지 못하고 곧 사직했는데, 이때 구술자는 총무부장이었다. 따라서 구술자가 분회장 직무대리를 맡게 되었다. 업무상 직책은 부기사였다.
1977년 5월 18일 분회장으로 정식 선출되었다. 그러나 4개월 만에 예상하지 못했던 입대 영장을 받았다. 노동조합은 산업선교회나 JOC와 연계되어 있지 않았다. 조합원이나 간부들이 이들 단체에서 교육을 받거나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노동조합 활동과 연계시키는 것은 차단했다. 개인적으로는 JOC가 더 합리적이고, 진실한 것 같았다. 사장 곽창호는 평양에서 남하한 기독교인으로 충장교회의 신자였다. 회사 내에 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독실했다. 부인 강응순이 회사를 실질적으로 관리했는데, 노동자들과 갈등이 심각했다. 특히 1980년 4월 16일에 강제예배사건으로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군 복무하는 동안 분회장을 부분회장 임봉식에게 위임했는데, 이 기간 동안 간부들이 많이 사직했다. 1년 6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하려 했으나, 회사가 거부했다. 한 달에 걸친 복직투쟁으로 1월 15일 복귀해 기사의 업무를 맡았다. 구술자는 총회를 걸쳐 1978년 3월 2일 분회장으로 재 선출되었다. 전 분회장 임봉식은 현장에서 일하다 얼마 후 사직했다. 분회장이 된 다음 날 준법투쟁에 들어갔다. 1979년 9월에는 상여금 인상 등을 쟁점으로 파업을 벌이고 15% 인상을 성취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시점에도 파업을 벌였다. 기숙사 사감의 행동도 노동자들의 지탄 대상이 되어 투쟁을 통해 바꾸었다. 1980년 5월에도 협상하여 6월 9일 단체협상을 체결했다.
신군부의 정화조치는 무궁화주식회사에도 밀려왔다. 구술자는 몇 차례 경고를 받다가 1980년 12월 8일경 서대문으로 연행되었다. 무궁화주식회사에서는 혼자 연행되었다. 구술자는 폭행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으나, 원하는 답에 수긍하지 않자 1981년 1월 6일 원주 소재 삼청교육대로 이첩되었다. 노동운동 분야에서 삼청교육대로 이첩된 사람은 임재수, 이기창 등 7∼8명이었다. 회사는 삼청교육대 입소한 다음 날 구술자를 해고했다. 대다수의 삼청교육대 입소자들이 그러했듯이, 그곳에서의 생활은 악몽이었다. 구술자는 1월 26일 석방되어 복직투쟁을 벌였으나,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패소하면서 중단했다. 2010년경 삼청교육대 관련 민사보상을 청구했는데, 현재에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무궁화주식회사는 1980년대 초반에 폐업했는데, 지가는 100배 이상 상승해 있었다. 수출만 전념하고, 국내시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삼청교육대 출소 이후 편직회사, 택시회사, 노동문제상담소를 걸쳐 현재는 외국계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사회 활동으로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무궁화주식회사 노동조합 분회장 활동 중 정화조치로 체포되어 조사받은 이야기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