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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자
사업개요
-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2차년도 과제인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결성 경위와 활동 성과를 파악하고, 1980년 신군부가 단행한 ‘정화조치’의 실상을 관련자 구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자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지원 조직의 활동 및 삶을 고찰함으로써 기존 생산된 자료나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5·17 이후 정화조치가 각 사업장에서 작동한 방식과 그 구체적인 피해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과거의 활동이 당사자들의 이후 생애와 인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70~80년대 노동운동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하고 관련 사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김연자
- 면담자
- 이영재, 정호기, 이소영
- 구술일자
- 2019. 9. 9
- 구술장소
- 4.9통일평화재단
- 구술시간
- 154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5. 충남 연기군 출생
1971. 천안 소재 가발공장 입사
1972.~1973. 서울 상경, 서울통상 입사
1974. 남영나일론 입사
1974. 영등포산업선교회 활동
1980. 민주노조 건설운동 좌절, 정화조치로 퇴사 협박
1981. 남영나일론 퇴사, 결혼
1990. 갈릴리교회 외국인 노동자 선교 활동
2007.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2008.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입학
- 구술내용 요약
-
김연자는 1955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출생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집안일을 돕다가, 연기군 인근과 천안시 소재 가발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1972∼73년경 상경해 친척이 소개한 문래동 소재 서울통상에 입사했다. 관리자가 노동자를 폭행한 것을 보고 친구와 이직을 결심했다.
김연자는 1974년 남영나일론에 입사했다. 신용협동조합에 저축한 것을 계기로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인연을 맺었고, 각종 프로그램과 소모임에 참가했다. 구술자가 소속된 소모임은 ‘늘벗’으로, 남영나일론의 같은 라인 동료들이었다. 입사할 때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1,000여 명이 동시에 점심식사를 하여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정시 퇴근을 해본 적이 없고, 회사는 카드로 출퇴근을 관리했다. 7년 동안 근무했는데, 5년 동안은 여러 이유들을 대며 ‘시다’로 근무하게 했고, ‘미싱사’로 근무한 것은 2년이었다. 산업선교회에 다니면서 노동법과 노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다른 회사 노동조합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 각성하게 되었다.
1976년 어용노조 민주화가 실행되었다. 대의원대회(1976. 5. 15.)에서 지부장을 문창석에서 나주식으로 교체하고자 했다. 투표 결과 50대 50표가 나왔다. 산업선교회의 지원을 받았던 노동자들은 섬유노조를 대신해 참석한 방용석 지부장을 신뢰했는데, 정회 후 속개하지 않았다. 이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농성이 한 달 가량 계속되자, 노동조합 집행부에 3명이 들어가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이것은 기존 노조를 합법화하는 것에 불과했다. 1976년 11월 15일 이른바 ‘정전사건’으로 노사갈등이 격화되었다. 회사가 근무시간 변경을 시도하자, 노동자들은 출근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회사 측에 의해 14명이 구타를 당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피해자를 연행했다. 이 일로 그동안 미운털이 박혔던 교육선전부장 이순정이 해고되었다.
1977년 3월에는 잔업거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정시 근무 후 잔업을 거부하자, 회사는 출근카드를 돌려주지 않아 대치 국면이 형성되었다. 5월에는 임금인상 투쟁이 발생했다. 양남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려다 11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처분을 받았다. 구술자는 용케 연행을 면했으나, 동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 곤혹스러웠다. 11명은 YWCA 등이 주도한 불매운동 덕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노동자들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난입해 인명진 목사와 명노선 전도사를 폭행하고 위협하는 일이 발생했다. 11명은 6월 24일 현장에 복귀해지만, 별도 관리되었고, 결혼한 사람들이 퇴직하면서 위축되었다. 1978년 3월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5개사 연합시위를 전개하다 6명이 구속되었다. 남영나일론에서는 진혜자가 옥살이를 했는데, 구술자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석방 이후 소식이 단절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사망 이후 1980년 5월 17일 이전까지는 노동자 교육을 강화하는데 활동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5월 17일 인명진 목사가 연행되면서 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구심이 약화 및 해체되었다. 김연자 등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알리는 유인물을 회사에 비밀리 배포하기도 했다. 정화조치가 시작되자, 회사는 사직과 삼청교육대 입소 중에 선택하라고 했다. 구술자는 사직하고, 1981년 결혼했다. 이후 다양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2008년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못 다한 공부를 했다. 노숙인 상담과 자원봉사,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 등의 활동을 걸쳐 약 10년 전부터는 인천에서 결식아동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도시락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노동계 정화조치로 남영나일론에서 강제해고 당하는 과정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