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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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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남상헌
면담자
이영재, 정호기
구술일자
2019. 7. 23
구술장소
4.9통일평화재단
구술시간
134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64. 고려피혁 입사

1968∼1980. 화학연맹 고려피혁지부 지부장

1975. 크리스천아카데미 노동사례연구회 회장

1980. 정화조치 대상으로 선정되어 해고

1984.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참여

1988. 80 해직노조간부복직추진위원회 참여

1990.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상임지도위원

민주노총 지도위원

민주노동당 노동정책 고문

2008.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구술내용 요약

이 면담은 2018년 7월에 실시한 구술채록 내용의 수정, 보완과 추가를 위해 구술자의 요구로 이루어졌다. 먼저 수정할 사항은 출생지가 서울시 서대문구 영천동 184번지이며, 금화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어서 1964년 고려피혁에 입사하고, 1966년 부분회장이 되었으며, 1967년 분회장에 선임되었다고 정리했다. 구술자가 노동조합 분회장으로 선출되자, 회사는 노동조합 지원비 지급을 중단했다. 이 위기는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조합비를 인상하는데 승인하여 극복했다.

전 분회장은 권창호였고, 서울지역 지부장은 서울미원 오희철이었다. 오희철은 7년 연상이었고, 인품이 좋았으며, 유대가 깊었다. 그는 구술자의 권유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으며, 2∼3달 만에 조합원의 수를 900명 선에서 1,800여 명으로 확장하여 회사와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는 얼마 후 사직했으며, 몇 년 후 암으로 사망했다. 

고려피혁은 1972년 대우에 인수되었다. 노동조합은 유니온 샾은 아니었으나, 노동자가 100% 가입했다. 인수되기 전에 두 차례 부도가 발생했고, 1971년 3월에 임금이 체불되었다. 조합원 전원이 단식농성을 전개하여 수령했다. 인수 과정에서 쟁점은 퇴직금 정산과 고용 승계였다. 화학노조와의 관계는 원활하여 극빈 조합원에게 원조물자로 제공된 밀가루를 공급했다. 고려피혁의 임금은 인근 사업장들과 비교할 때, 양호한 편이었다. 고려피혁의 경영이 악화된 주요 이유는 잘못된 예측으로 원자재를 대량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노조의 위기는 여러 차례가 있었는데, 1973년 12월 사무실 공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그 하나였다. 노조는 1974년부터 공제회를 운영하여 노동자를 상대로 한 회사 간부들의 불공정 대부 행위를 차단하고자 했다. 노동조합의 성과에는 ‘장화수당’을 빼놓을 수 없다. 노동조합은 수해 지원이나 경조사 등을 통해 조합원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회사 측은 조합원들을 매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고려피혁은 업종의 특성상 유해 작업장이었으나, 가톨릭대학 교수들이 주관한 조사에서 무해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고려피혁은 ‘쌍 매표’를 상징으로 달았다. 대전피혁과 고려피혁이 경쟁했는데, 고려피혁이 생산량의 측면에서 앞섰다. 서울대 화공과 출신들이 취업해 생산 관리를 주관하기도 했으나, 현장 숙련자들에 미치지 못했다. 고려피혁은 그 시대의 다른 사업장들과 달리 남성 노동자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의견 수렴과 활동 방향 정립이 지체되었다. 고려피혁은 산업선교회나 JOC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 분야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교환하기는 했으나, 조직적인 연계는 없었다. 

1975년 5월 13일 크리스찬아카데미 사례연구회가 발족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해산할 때까지 연임했다. 회사는 물론 화학노조로부터도 사퇴 압력을 받았다. 정보과는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1979년 2월 임금협상에서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용인공장이 먼저 타결하여 진행이 참으로 어려웠다. 1979년 5월 용인지부와 노동조합 통합이 이루어졌는데, 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겼다.

1980년 9월 17일 한국노총 안양교육원에서 노조 간부 교육을 받다가 노동계 정화조치 대상자로 통보받았다. 남화전자, 반도상사 조금분 등도 대상자였다. 기존 활동도 문제였지만, 1980년 3월 27일을 전후해 임금인상을 쟁점으로 단식농성 등을 전개한 것이 중요했다. 이때 한국노총 오승용 부장이 수차례 다녀갔고, 3월 29일에는 대우 사장 자택을 항의 방문했다. 4월 20일 유니온 마그네틱 지원 투쟁 과정에서는 아찔한 부상을 당했다. 5월 13일 개최된 한국노총 궐기대회에는 조합원 150여 명이 참가했다. 1980년 12월 30일 회사로부터 정식 해고되었다. 추가 구술은 1980년 정화조치 이후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으나, 예정과 달리 진행되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노동계 정화조치 당시 고려피혁 지부장으로서 해고당한 과정과 소회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