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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우
사업개요
-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2차년도 과제인 '70년대 민주노조와 5.17이후 정화조치'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결성 경위와 활동 성과를 파악하고, 1980년 신군부가 단행한 ‘정화조치’의 실상을 관련자 구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역사 자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 노동운동가와 지원 조직의 활동 및 삶을 고찰함으로써 기존 생산된 자료나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5·17 이후 정화조치가 각 사업장에서 작동한 방식과 그 구체적인 피해 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과거의 활동이 당사자들의 이후 생애와 인식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70~80년대 노동운동사가 지니는 현대적 의미를 조명하고 관련 사건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봉우
- 면담자
- 이영재, 정호기
- 구술일자
- 2019. 8. 27
- 구술장소
- 민주인권기념관 회의실
- 구술시간
- 197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노조와 정화조치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8. 충남 계룡시 출생
1973. 3. 서울 구로공단 소재 ㈜ 대협 입사
1976. 노사협의회 대표 선출
1978. 6. ㈜ 대협에서 해고
1978. 10. ㈜ 남화전자 입사
1980. 1. 15 전국연합노동조합 서울지역본부 남화분회 결성
1980. 7. 분회장 직무대리
1980. 12. 정화조치 대상자, 수배, 해고
1985. 민한당사 점거농성
1985. 8. 서울노동운동연합 초대 사무국장
1987.-1998. 구로노동상담소 소장
- 구술내용 요약
-
이봉우는 1958년 충청남도에서 출생했다. 1973년 상경해 오빠들이 거주하던 구로역 일대에서 생활했다. 협진양행에 2달간 취업했다가, 같은 집에서 세를 살던 언니의 소개로 미국 마텔사의 한국 하청기업인 대협에 취업했다. 마텔사는 바비 인형을 생산했다. 마텔사는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자 1979년경 철수했다. 이봉우는 직전에 해고되었다. 마지막 미지급 임금을 어머니가 노동부에까지 항의하여 받았다. 대협은 안광수 목사가 주도한 경수도시산업선교회와 긴밀했다. 이봉우도 산업선교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두 차례 노사협의회 위원을 역임했다. 이봉우는 안 목사가 노동조합 보다 노사협의회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의구심을 가졌고, 점차 소원해졌다. 회사는 10여 명을 해고시키려 했는데, 이봉우가 도시산업선교회와 멀어지자 타깃으로 삼았다. 이봉우는 1978년 6월 친구였던 한성순과 해고되었다. 해고는 회사와 도시산업선교회가 협상하여 2명에서 멈추었다. 안광수는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연계시키지 않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와 경쟁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협에서 해고된 후 유니전, 효성물산, 남영나일론 등에 취업하려 했으나, 블랙리스트에 수록되어 불가능했다. 이 무렵에 야학을 하던 이태복 등을 만났다. 운이 좋게 한국음향에 취업했으나, 남부서와 노동부에 포착되어 중단했다. 얼마 후 신생기업이었던 남화전자에 입사했다. 한성순도 남화전자에 입사했다. 회사는 3개월 만에 이봉우의 실체를 파악했다. 남화전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때는 조명자의 도움을 받았다. 조명자는 광민사 출판사와 냉동학원을 운영하던 장명국 라인이었다.
남화전자는 이봉우를 회유하기 위해 QC부서에 배치했다. 회사는 길기배를 노동조합 분회장으로 선출하려 했다. 화학노조는 노조 결성의 지원자로 이기붕을 세웠는데, 계엄령이 해제된 후 결성하자고 미뤘다. 상황이 녹녹치 않자, 회사는 1980년 1월 15일 연합노조로 산하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봉우 일행은 조명자의 조언을 받아 노조 탈퇴운동을 했다. 이봉우는 해고되었다가, 항거로 복직되었다. 회사가 노동조합 운영의 주도권을 넘겨 3월 25일 배복자를 분회장으로, 부분회장으로 이봉우와 이귀남을 선출했다. 배복자는 조만간 사직할 예정이었다. 한성순은 결혼하면서 사직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은 김귀균(김세균 동생), 정강자(최영희 이대 후배) 등이었다.
5·18민주화운동 국면은 조심스럽게 넘어갔다. 이봉우는 198년 7월 28일 분회장이 되었다. 노조는 체불임금을 쟁점으로 단체행동을 벌였고, 당국의 감시가 계속되었다. 이 무렵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1년 2개월 동안 입원했다. 정화조치 국면에는 장명국의 권유로 잠행했다가, 다른 회사들의 노조 간부들이 풀려난 것을 보고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는 12일 간의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했다. 남화전자는 기술 낙후로 1981년 5월에 폐업했다. 회사는 폐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퇴직금을 강제로 지급했다.
이후 이봉우는 인천 소재 이성전자, 성화섬유 등에 취업했다가 해고되었다. 1985년 민한당사 점거농성에 참여했다가 구류를 선고받았다. 그해 8월 서울노동운동연합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수배를 받게 되었고, 1986년 4월에 연행되어 1987년 6월에 석방되었다. 그해 11월 13일 설립된 구로노동상담소 소장을 지냈다. 1987년 범한전기 노동조합 등을 지원했다가 3자 개입 위반으로 10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남화전자노조 분회장 활동 중 노동계 정화조치 소식을 듣고 도망다니다 해고당한 이야기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