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유화국면 이후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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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욱광주일고 다닐 당시 15개 남녀 고등학교 연합서클인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열심히 했다. 형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서울대 철학과를 다녔고,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공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와 중국집을 운영했다. 종로학원 재수생 시절 5.18이 일어났고, 재수생들 중 광주 출신들이 모여 광주에 내려가려고 했지만 항쟁이 끝나 무산된 일이 있었다.
대학 진학 후 농법회에 가입했고, 3월 19일 첫 데모부터 열심히 참여했다. 덩치가 작고 빠른 편이어서 잘 도망가는 편이었다.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대학 2학년 때 2주간 혹독히 농활을 다녀온 뒤 사회변혁을 위해 인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80학번에 이어 81학번 법대 포스트가 되었고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조직사건을 일으켜 사람들을 잡아가면 운동 바람이 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학생운동이 사회변혁에서 중심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그리 흔하지 않는 사건이다. 박종운은 자기네가 다 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단식으로 몸무게를 빼서 군대 문제를 정리하고, ‘새로운 인식과 실천방향’과 같은 문건을 통해 깃발을 통해 별도의 투쟁조직 필요성을 주장하던 MT그룹을 비판했다. 삼민투가 한 미문화원 점거 농성도 우리가 주도한 투쟁이었다. NL-CA국면으로 넘어가면서 종전의 Po시스템은 1985년도에 해소되었다.
학교생활 이후 신광표 형광등에 취직하는 한편, 인천 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6월 항쟁 후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제정구 의원실에 들어가 입법보좌관 일을 했고, 광주에 와서 변호사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운동 내부의 갈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군사독재정권의 불법성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개인적인 고민과 결단 이후 인생투신을 존중해야 한다. 개인사적으로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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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경기고 신문반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성균관대 무역학과 78학번으로 입학해 도산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2학년 때 친구들이 군대에 강집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3학년으로 5월 1일 시위를 주동했다. 이 시위는 처음으로 가두로 진출한 시위였다. 이 시위로 비공식 수배를 받아 잠적하던 중에 서울역 회군과 5.18민주화운동이란 큰 사건이 벌어졌다.
1980년 9월 개강 후 학교로 다시 돌아왔지만 학생운동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군부의 억압으로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때 학생운동 재건의 움직임이 몰래 이뤄졌다. 전민학련에 들어가 활동하게 됐는데, 나중에 학림 사건으로 구속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무림이 대거 구속된 후 학생운동 공백기가 왔지만 이를 학림이 대신 채워나갔다. 서울대에서 1981년 3월 19일 시위가 있었고, 성균관대에서 3월 30일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시위 역량이 된 학교는 서울대 다음으로 성균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라 주동으로 체포될 경우 최소 15년 징역을 살 거라는 각오로 시위를 주도하게 됐다. 성균관대에서는 이후 5월 12일, 5월 30일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학림은 서울대와 성균관대를 연결하는 학간연대를 통해 빛이 났다. 학간연대는 이후 민정당사 농성이라든지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여기에 성균관대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학림의 전통을 이어간 것이다.
1981년 3월 30일 시위 이후 수배를 파악한 후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5월 말 체포돼 소위 학림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받은 고문으로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도수 치료를 받아왔으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
석방된 후에는 노동 운동을 하면서 성균관대 학생운동과 일정 정도 거리를 뒀다. 1985년 후반기에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 쟁취가 아닌 근본적인 헌법 개정으로 가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제헌의회(CA) 그룹에 속하게 됐다. CA노선에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1986년 1월에 결혼을 했는데, 부인도 같이 CA활동을 했다. 1987년 1월에 부부가 체포됐다. 감옥은 1988년 올림픽이 끝난 후 12월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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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부산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으나 주변 기층민중의 삶과 고교 시절 교육 영향으로 사회의식에 일찍 눈을 떴다. 서울에서 재수하면서 서울의 봄과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저항의식을 키웠다.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여러 운동성 서클에 참여해 구성원과 관계를 형성하였다.
1981년 1학년 때 5.20시위 후 이념서클 대상 시위 동원의 한계를 뛰어넘어 학과 중심의 동원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경제학과 학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고려대 내 최초의 학회로 생각되며, 이를 시작으로 운동권 학회와 서클 조직이 확산되어 학내 학생운동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1학년의 문무대 입소 시위, 이른바 109인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정경대 비합법 언더모임에서 집중적으로 학습하였다. 2학년 겨울방학 때는 80학번이 중심이 되어 등록서클과 학회, 지하서클을 망라하는 단일대오를 구축하는 시도가 있으나 3.7사건으로 학내 운동을 주도하던 겨레사랑회(겨사) 지도부가 대거 강제징집되었다. 그 여파로 고려대 학생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겨사그룹의 독선적 운영이 문제가 되어 학내 운동권이 겨사 대 비겨사로 분화되는 흐름이 생겨났다.
새로운 학생운동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 문학연구회(문연), 정경대, 문과대, 법사경, 애기능 등 5개 섹터로서, 여러 언더팀 포스트와 주요 사안을 논의하고 조율하는 전체 지도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4년에는 문과대와 정경대의 비겨사 언더연합체의 중심(CT) 역할을 하게 되는 이른바 문정그룹을 조직, 유화국면 시기의 투쟁 방향 설정과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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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식서울에서 태어나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법대에 가려고 서울대 사회계열 지망했으나 ‘유신법대’가 싫어서 경제학과를 선택하였다. ≪사회대평론≫과 영동 검정고시 야학을 하면서 사회의식에 눈떴고 학회(이념서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3학년 때 학생운동을 할 생각으로 기독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0.26사태 후 학생회 부활 작업을 주도하면서 학생운동권과 인연을 맺고 학생회장 간접선거 문제로 언더 지도부와 갈등하기도 했다.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후 전민학련 조직 제의를 받고 중앙위원으로 참여, 지부-지회-지반을 조직하고 조직원의 세미나를 지도하였다. 1981년 전민학련 조직을 중심으로 각 대학 시위를 지도, 지원하면서 국풍81 공간을 활용하여 횃불시위 등 대규모 반정부 투쟁을 준비하던 중 학림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출소 후 인천에서 노동운동으로 진로를 정하고 준비, 활동하면서 무너진 학생운동 재정비를 위한 지원을 한 것이 빌미가 돼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에 또 다시 연루되었다. 복역 중 후배 운동권의 요구로 자기비판을 하게 되고 공식적으로 모든 운동에서 손을 끊으라는 결정을 수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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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운청주에서 태어나 중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농사를 도와드렸다. 대학 진학에 실패해 직업 전선에 들어갈 생각도 했으나 재수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옹호하는 생각을 했고, 입학할 때까지도 데모할 생각은 없었다.
대학 진학 후 사회대평론에 가입해 토론 공부를 했고, 5월 27일 운동권도 아니었던 전라도 광주 출신의 김태훈 학형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 받아 운동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일제시대와 한국의 근대를 수탈과 착취로 인식한 마르크스주의에 입학한 책과 논문들을 보고 당시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지도적인 위치에 올라선 3학년과 4학년이 되어서는 군사독재정권에 좀 더 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운동 조직의 실천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는 전통적으로 Po시스템이라고 하는 단과대별 동원체제가 있었는데, 보다 기동적인 조직 형태가 필요하다고 봐서 동료들을 설득했다. 내가 속해있던 대문의 시각이 학생운동을 이끄는 사람들 내에서 주류가 되었고,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깃발>을 배포했다. 우리와 반대 입장에 있던 기존의 주류(MC)가 우리의 문제제기로 퇴조한 뒤 주사파가 나타났다.
CA로 넘어가는 시절 나는 노동현장으로 투신해 도바리 생활을 했다. 학교 후배 박종철 후배의 집에 들려 후배들을 모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도바리 중 신문에서 고문치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백태웅, 박노해 등과 <선봉>을 만들었고, 방위로 군생활하고 그동안 수해해제가 되었다. 그후에는 전국노운협에 들어가 기관지를 만드는 일을 했다. 이회창 밑의 이명우가 연락이 와 원희룡, 정태근 등과 함께 한나라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자유민주주의 학생운동을 하겠다. 개인사가 들어간 이런 진술을 한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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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혁문학가를 꿈꾸며 고려대 국문학과에 진학하였다. 2학년 때 누나 친구의 권유로 한국학연구회 가입, 농촌활동에 참여한 뒤 YH사건을 보고 시위를 결심하였다. 9.18시위로 구속됐으나 10.26사태와 함께 면소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혼자서 독서로 운동권 커리큘럼을 섭렵하고 서울의 봄 정국에서 다시 빵잡이라는 이유로 조사를 받는 등의 과정에서 학생운동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1980년 10.17시위로 선배 운동권이 대거 사라진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학내 운동을 지도하는 위치가 되었다. 시위 조직과 동원을 지원하면서 주동자의 신변 정리와 경찰 조사에 대응하는 요령 등 학생운동원의 준칙과 주의사항 등을 교육하였고, 이념서클 등 각 운동 단위의 갈등을 조정하였다.
1982년 졸업을 앞두고 학생운동을 정리하기 위해 그동안 축적한 노트를 전달하려다 예비검속에 걸려 모든 책자와 문건을 압수당하고 구속되었다. 출소 후에는 예정된 노동운동의 길을 걸었다. 운동의 오류와 한계를 지금도 추론 중이며, 지금은 청년시대의 꿈을 소설 속에 펼쳐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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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용구술자는 경남 함안 출생으로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동성고 재학 시절 부마민주항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형성했다. 1980년 대학 입학 직후 '서울의 봄' 당시 아크로폴리스 광장 집회를 목격했으며, 5월 13일 신촌 미팅 중 우연히 대중 연설을 하기도 했다.
대학 진학 후 학내 지하 서클에 가입하여 세미나와 토론 중심의 학습을 시작했다. 광주항쟁의 실상과 5.18 비디오 시청은 의식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유럽과 남미의 좌파 이론,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주요국 혁명사 등을 섭렵하며 한국 사회의 변혁 방안을 모색했다.
1980년대 중반 유화국면 속에서 비합법 활동을 이어갔으며, 문용식의 제안으로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 및 학간연대에 참여했다. 윤성주와 함께 조직의 정치신문 격인 문건 '깃발' 제작을 주도했다. 당시 추구한 사회주의적 지향은 구체적인 체제 구상보다는 반독재·민족자주화라는 현실적 과제에 집중된 형태였다.
TV 시청 중 연행되어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 출소 후 역사문제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다 대학원 진학 대신 사법시험 준비로 전향했다. 수감 중 사법연수생 신분이던 백태웅을 만난 바 있으며, 사노맹이나 NL 주사파 세력과는 수감 시기 등의 이유로 직접적인 접점은 없었다. 이후 학생운동 시절의 경제학적 관심을 바탕으로 금융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
구술자는 저항운동의 생명력을 도덕성에서 찾으며, 이론의 교조화와 앵무새 같은 답습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다. 80년대 운동권(386세대)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은 인정하나, 현 세대에게 기득권으로 비춰지는 한계 또한 직시한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행적을 부각하거나 보상을 바라는 데 소극적이나, 당시 희생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보상의 필요성에는 동의한다. 본 구술 참여는 과거의 공백이 왜곡된 해석으로 채워지는 것을 방지하고 사실에 입각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하여 결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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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구서울대 자연과학대 입학 후 배문고 선배의 권유로 국제경제학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실험실 출석 의무가 적은 수학과를 선택하였다. 학회 활동을 하면서 영동 고시야학 강학과 야학연합회 활동을 한 것이 학생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광주사태를 접하고 충격을 받아 유인물 활동을 하던 중 선배로부터 그보다 더 중요한 조직화 작업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1981년 무림그룹이 해체된 학내 운동권의 지도부를 맡아 1학기 시위투쟁을 조직하였다. 한편으로 전민학련의 경인지부장을 맡아 수도권 대학의 각종 시위투쟁을 조직,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전민학련은 윗선부터 드러나 반국가단체사건으로 비화됐고,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몸이 상하는 고문과 함께 어렵게 살던 가족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984년 유화국면과 함께 벌어진 복-비복 논쟁에서 단체 복학을 거부하고 학외에서 학생운동 지도부 재건을 도왔다. 하지만 4인 협의체의 구상에 따른 학내 지도부는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으로 또다시 궤멸되었고, 최민과 함께 거기서 살아남은 세력을 규합해 제헌의회(CA)그룹을 조직하였다. 이 때문에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초를 당하고 폐인이 된 상태로 출소해 혁명운동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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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배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지금의 광명시인 시흥으로 이사를 왔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82학번으로 입학해 언더 서클에 가입하였다. 서클의 이름은 없었다. 여기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다.
서강대에서는 3대 패밀리가 있었다. 79패밀리와 80패밀리, 그리고 허티(허팀)가 있었다. 이들 패밀리 밑에 언더 서클들이 있었다. 구술자는 80패밀리에 속해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KUSA(유네스코 학생회)의 RP를 맡아 후배들을 지도했다. 유화국면이 시작된 3학년때(1984년)에는 서강대 학자추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학자추는 기존의 학도호국단과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학도호국단은 학교측과 연결된 어용 학생조직이었다. 하지만 학자추 모임때 구술자가 나서서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돌을 던졌다. 그 이유로 학도호국단이 학생회 조직에서 물러나고, 학자추가 학생회의 명실상부한 자치 조직이 됐다. 학자추는 서강대 CT(컨트롤 타워)와 연결돼 학생운동을 이끌어갔다.
구술자는 서강대 학자추 활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월 6일 집회 도중 후문 건너편 동사무소에서 집회를 촬영하던 형사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곳을 덮쳐 마포서의 형사(김향춘)를 잡았다. 유화국면은 전두환 정권의 기만 정책일 뿐 실제로는 학원 사찰해왔다는 증거를 잡게 됐다. 사진을 인화한 결과 서강대 집회를 찍은 사진들이었다. 김향춘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인해 서강대에서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의사 진료의 명목으로 김향춘이 풀려났지만 그때 등장한 의사가 시경 간부였음이 언론을 통해 폭로됐다.
1984년 2학기에 서울대 등에서 총학생회를 출범시켰지만, 서강대는 학자추 성격의 민학련으로 활동했다. 구술자는 학생회 출범을 주장했지만, 소수 의견에 머물렀다.
서강대는 1985년 학생회를 출범시켰다. 이 과정에서 서강대 CT가 출범의 역할을 맡았고, 구술자도 여기에 참여했다. 구술자는 초대 총학생회의 기획부장을 맡았다. 학간연대로는 인근 연세대와 자주 만났다. 미들캠이라는 학간 연대도 있었다. 서울 학생운동의 서울대, 고대, 연대, 성대 외의 중간 정도의 대학 연대였다. 미들캠은 일방적인 서울대 중심의 학생운동 주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서강대가 1985년 5월 미 문화원 점거 농성에 4대 메이저 캠퍼스와 함께 참여함에 따라, 미들캠 연대는 자연스럽게 깨지고 말았다.
수배와 구속을 거쳐 노동운동으로 나섰다. 대학은 정식 졸업을 하지 못한 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서강대 민주동우회에서 활동하며 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의기 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며 평전 출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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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선학생운동 참여는 여타의 다른 80년대 학생들처럼 당대에는 부모의 이해를 받진 못했다. 사회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은 사회학을 전공하면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대학 들어오자마자 100일간의 휴교령이 떨어졌는데, 노는데 바빴다. 휴교령과 상관없이 5월의 봄은 모두 겪었다. 서울역 회군이 있던 5월 15일에 전경에 붙잡혀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휴교령이 끝나고 서클 목하회에 가입했다. 거기서 의식화 학습을 하게 된 것이다. 1983년 학원 자율화 이전까지는 경찰이 사복입고 학내에 상주하는 분위기였다. 5.18비디오나 증언책 등이 학생운동의 길을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개인원칙으로 졸업을 포기한다, 감옥을 감수한다, 학생운동 이후에는 노동운동을 한다는 세가지 결심을 했다. 4학년이 되어서도 이른바 '권내'에 있는 사람은 30명이 안되었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이었다.
마르크시즘 접한 것은 1학년 말 2학년 초 무렵이다. 당시는 일본어로 된 책들을 봤다. 운동 전술이 담긴 팜플렛 야학비판 이런 것이 돌았는데 1학년은 잘 안보여줬다. 졸업정원제로 들어왔지만, 비판적인 인식이 있었다. 졸업정원제 폐지가 대중적 구호였다. 1982년부터 생성된 페더는 서울지역 4개 대학(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의 연계시스템이고 지역별로 북부지구에 있던 성대가 국민대같은 대학을 맡고, 서부는 연대가 서강대, 이대, 명지대, 홍익대를 연결하는 시스템이었다. 지방으로도 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무림 학림 논쟁이나 MT-MC 논쟁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연대 내에서는 M.P.R. 논쟁이 있었다. M은 Mass 대중, P는 정치적 선도투쟁조직, R은 재생산시스템을 말한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 논쟁을 미사일 논쟁이라고 불렀다.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 있는 언더 운동 지도시스템에 나중에는 다산보임과 같은 외부 조직이 프락션이 들어오는 외티 문제도 벌어졌다. 83년 11월 25일 교내시위 주동으로 구속되어 그 뒤 논쟁에서는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유화국면 직전, 안기부장이 면담을 왔던 것이 기억난다. 학생들이 좌경화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어떤지 알아보려고 했던 걸로 추정한다. 출소 후 노동운동으로 존재이전 준비를 하면서 MPR 후유증과 외티 문제에 대해 조언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입장은 비주사 NL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NL의 수령론은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런 정리문건을 20페이지짜리 만들어 돌렸는데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평택의 금성 비디오 공장에 들어갔다가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때 파업 주도하면서 구속되었다. 해고자 복직투쟁을 하다가 생계일로 학원강사, 영어를 하다가 신혼집을 찾아온 노무현 의원을 만나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회고를 해보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익명으로 헌신한 탁월한 리더들이 많았다. 고문 피해를 입고도 민주화 보상신청을 하지 않고 자기 경력을 내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나 자신이라기보다 이걸 계기로 그렇게 헌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 더 부각되길 원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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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서울대에 입학해 흥사단아카데미에 가입 신청했으나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후 대학문화연구회와 인문대 교지 ≪지양≫ 편집실에서 학생운동에 눈을 떴다. 1980년 서울역 회군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이른바 학림의 노선에 동조하고 이전과는 다른 택[전술]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내부 문제와 무림사건으로 시위가 무산되고 이듬해 학생운동 지도부의 섀도캐비닛 역할을 맡게 된다.
1980년 학림사건으로 조사받지만 곧 나와 무기정학 상태에서 무림-학림이 사라진 공백 상태의 학내 운동권 재생산과 시위투쟁 등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주항쟁과 신군부의 폭압, 대학생 수의 증가, 청년학생의 반감 고조 등의 새로운 학생운동 환경에서 사회혁명을 생각하고 레닌주의의 방법론에 입각한 투쟁조직과 방법을 구상하였다.
1984년 유화국면이 도래하면서 뒷날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의 주역들과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의 방향, 새로운 투쟁조직과 방법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였다. 하지만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서 ≪민주화의 길≫ 편집에 전력하던 때라 직접적인 연루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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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구술자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어문계열(2학년때 독어독문학과 선택)에 81학번으로 입학했다. 우연한 기회에 심산연구회라는 오픈 서클에 들어가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2학년에는 문과대 어문계열, 3학년에는 문과대 전체의 학생운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성균관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점점 다가섰다. 성균관대에서는 CT(컨트롤 타워)를 통해 학생운동을 조직하고 시위 계획을 마련하였다. 구술자는 단과대 포스트로서 단과대 CT에 참여하였고, 1984년 5월에는 단대 대표격으로 성균관대 전체 CT에 참여했다. 당시 성대 CT에는 오픈 서클과 언더서클을 담당하는 한 명, 학간 연대를 담당하는 한 명, 단대 담당자가 두 명, 오픈 투쟁 담당이 한 명, 이렇게 해서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CT에서 성대의 학생운동 방침이 정해지고 실행이 되었다.
성균관대에서는 유화국면 시기에 학자추 대신 성민추(성균관대 민주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이 이미 학도호국단 체제를 맡고 있는 상황이어서 학도호국단과 성민추가 1984년 1학기 국면을 이끌어나갔다. 2학기때 다른 대학에서는 총학이 출범했지만 성대에서는 벌써 학생운동권이 중심이 돼 있었기 때문에 굳이 총학을 출범할 필요가 없었다. 민정당사 농성 시위와 미 문화원 점거 투쟁때에는 CT에서 인원을 동원하는데, 이 역할을 맡았다. 성균관대가 다른 대학에 비해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성균관대 학생운동이 빛을 발한 것은 1985년 후반기에 오수진 총학생회 회장이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김민석 서울대 총학생회 회장이 의장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후 오수진 의장이 역할을 넘겨 받았다. 당시 성균관대 CT에서는 오수진 의장이 체포되지 않도록 사수대를 결성해 그 역할을 맡겼다.
서울대에서의 무림-학림 논쟁, 깃발 –반깃발 논쟁, MC-MT 논쟁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균관대에서는 학림-깃발-MT로 이어지는 단일 노선을 강조해왔다. 이 전통은 구술자가 학교에서 활동하던 1986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