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천호선

  • 공유하기

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천호선
면담자
정용인
구술일자
2020.8.7.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구술시간
128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유화국면 이후 학생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82.2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입학

1981.3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1983.12 학내시위주동으로 구속

1987.8 금성사 평택공장 파업주도로 구속

1991.3 노무현의원 비서관

1992.3 유인태의원 보좌관

2002.3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

2007.5 대통령 비서실 대변인

2008.1 대통령 비서실 홍보수석

2010.1 국민참여당 최고위원

2013.7 정의당 대표

2018.9 노무현재단 이사

구술내용 요약

학생운동 참여는 여타의 다른 80년대 학생들처럼 당대에는 부모의 이해를 받진 못했다. 사회학과를 지망하게 된 것은 사회학을 전공하면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대학 들어오자마자 100일간의 휴교령이 떨어졌는데, 노는데 바빴다. 휴교령과 상관없이 5월의 봄은 모두 겪었다. 서울역 회군이 있던 5월 15일에 전경에 붙잡혀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휴교령이 끝나고 서클 목하회에 가입했다. 거기서 의식화 학습을 하게 된 것이다. 1983년 학원 자율화 이전까지는 경찰이 사복입고 학내에 상주하는 분위기였다. 5.18비디오나 증언책 등이 학생운동의 길을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개인원칙으로 졸업을 포기한다, 감옥을 감수한다, 학생운동 이후에는 노동운동을 한다는 세가지 결심을 했다. 4학년이 되어서도 이른바 '권내'에 있는 사람은 30명이 안되었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이었다.

마르크시즘 접한 것은 1학년 말 2학년 초 무렵이다. 당시는 일본어로 된 책들을 봤다. 운동 전술이 담긴 팜플렛 야학비판 이런 것이 돌았는데 1학년은 잘 안보여줬다. 졸업정원제로 들어왔지만, 비판적인 인식이 있었다. 졸업정원제 폐지가 대중적 구호였다. 1982년부터 생성된 페더는 서울지역 4개 대학(서울대, 연대, 고대, 성대)의 연계시스템이고 지역별로 북부지구에 있던 성대가 국민대같은 대학을 맡고, 서부는 연대가 서강대, 이대, 명지대, 홍익대를 연결하는 시스템이었다. 지방으로도 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무림 학림 논쟁이나 MT-MC 논쟁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연대 내에서는 M.P.R. 논쟁이 있었다. M은 Mass 대중, P는 정치적 선도투쟁조직, R은 재생산시스템을 말한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 논쟁을 미사일 논쟁이라고 불렀다.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 있는 언더 운동 지도시스템에 나중에는 다산보임과 같은 외부 조직이 프락션이 들어오는 외티 문제도 벌어졌다.  83년 11월 25일 교내시위 주동으로 구속되어 그 뒤 논쟁에서는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유화국면 직전, 안기부장이 면담을 왔던 것이 기억난다. 학생들이 좌경화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어떤지 알아보려고 했던 걸로 추정한다. 출소 후 노동운동으로 존재이전 준비를 하면서 MPR 후유증과 외티 문제에 대해 조언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입장은 비주사 NL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NL의 수령론은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런 정리문건을 20페이지짜리 만들어 돌렸는데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평택의 금성 비디오 공장에 들어갔다가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 때 파업 주도하면서 구속되었다. 해고자 복직투쟁을 하다가 생계일로 학원강사, 영어를 하다가 신혼집을 찾아온 노무현 의원을 만나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회고를 해보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익명으로 헌신한 탁월한 리더들이 많았다. 고문 피해를 입고도 민주화 보상신청을 하지 않고 자기 경력을 내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나 자신이라기보다 이걸 계기로 그렇게 헌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좀 더 부각되길 원해서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연세대 학생운동의 특성과 유화국면 투쟁방법 내부 논쟁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