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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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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민병두
면담자
윤호우
구술일자
2020.10.12.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구술시간
122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유화국면 이후 학생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77년 경기고 졸업 

1978년 성균관대 무역학과 입학

1990년 성균관대 졸업

1991년 문화일보 기자  

문화일보 정치부 부장

문화일보 워싱턴특파원

2004년 열린우리당 17대 총선기획단 단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비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서울 동대문을)

2014년 민주정책연구원 원장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서울 동대문을)

2018년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장

구술내용 요약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경기고 신문반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다. 성균관대 무역학과 78학번으로 입학해 도산연구회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2학년 때 친구들이 군대에 강집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3학년으로 5월 1일 시위를 주동했다. 이 시위는 처음으로 가두로 진출한 시위였다. 이 시위로 비공식 수배를 받아 잠적하던 중에 서울역 회군과 5.18민주화운동이란 큰 사건이 벌어졌다.

1980년 9월 개강 후 학교로 다시 돌아왔지만 학생운동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군부의 억압으로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때 학생운동 재건의 움직임이 몰래 이뤄졌다. 전민학련에 들어가 활동하게 됐는데, 나중에 학림 사건으로 구속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무림이 대거 구속된 후 학생운동 공백기가 왔지만 이를 학림이 대신 채워나갔다. 서울대에서 1981년 3월 19일 시위가 있었고, 성균관대에서 3월 30일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시위 역량이 된 학교는 서울대 다음으로 성균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라 주동으로 체포될 경우 최소 15년 징역을 살 거라는 각오로 시위를 주도하게 됐다. 성균관대에서는 이후 5월 12일, 5월 30일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학림은 서울대와 성균관대를 연결하는 학간연대를 통해 빛이 났다. 학간연대는 이후 민정당사 농성이라든지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여기에 성균관대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학림의 전통을 이어간 것이다.

1981년 3월 30일 시위 이후 수배를 파악한 후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5월 말 체포돼 소위 학림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받은 고문으로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도수 치료를 받아왔으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

석방된 후에는 노동 운동을 하면서 성균관대 학생운동과 일정 정도 거리를 뒀다. 1985년 후반기에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 쟁취가 아닌 근본적인 헌법 개정으로 가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제헌의회(CA) 그룹에 속하게 됐다. CA노선에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1986년 1월에 결혼을 했는데, 부인도 같이 CA활동을 했다. 1987년 1월에 부부가 체포됐다. 감옥은 1988년 올림픽이 끝난 후 12월에 나왔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학림이 주도한 1981년 5월 성균관대시위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