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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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형택
권형택은 1956년 2월 전라북도 익산군 팔봉면(현 익산시 팔봉동)에서 출생하여 전주고를 졸업하고, 1974년 서울대 인문대학에 진학했다. 농촌법학회에서 공부했으며, 1977년 11월 11일 민주구국투쟁선언문 사건으로 퇴학 처분을 받고 수배되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 복학했으나, 제적되었고 다시 수배되었다. 1981년 9월부터 1983년 5월까지 육군 제12사단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 제1차 녹화사업 대상자였다.
전역한 후 곧바로 이범영의 제안을 받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참여했다. 서울대 74학번 기별 대표를 맡았으며, 번역 일을 하다가 1984년 10월 연성수에 이어 민청련 사회부장이 되었다. 사회부장은 각 현장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일이어서 각종 사건에 연루되어 수시로 구류 처분을 받았다. 민청련은 1985년 2월 총선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기여했다. 1985년 안양노동상담소를 탄압하는 데 항거한 것을 이유로 6월에 구속되었고 7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84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가 창립하면서 민청련 회원들 가운데 이들 단체로 활동 공간을 이전하거나 지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면서는 더 많은 사람이 활동 공간을 다양화했다. 이 무렵 민청련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절정을 이루었고, 내적으로는 CNP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어려움이 컸다. 1985년 6월 김병곤이, 9월 김근태가, 그리고 10월 권형택이 당국에 연행되었다. 권형택은 1986년 9월 석방되었고, 김근태는 1988년 석방되었다. 석방되어 보니, 민청련은 1986년 인천5·3민주항쟁으로 공개 활동이 불가하여 언더 활동으로 전환한 뒤였고, 민통련도 탄압받아 위축되어 있었다. 권형택은 민청련 운영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사무실 기능을 회복하는 일을 맡았고, 6·10민주항쟁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총무국장과 청년학생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는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을 따랐다.
1988년에 들어 민청련 출신들 가운데 정계 입문자가 생겼고, 내부에서는 현장 중심론과 정치 투쟁우선론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이 논쟁이 마무리되고 보니 민청련의 인적 역량은 반감되어 있었다. 1988년부터는 민통련 사무차장으로 활동했는데, 세력이 약화한 상태였다.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창립하는 과정에서는 민통련을 해산하는 일을 맡았다. 1990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91년 4월 구속되었다. 전민련은 1989년 중반부터 정당운동 진출 등을 쟁점으로 사실상 균열 및 와해하고 있었으며, 연이은 방북으로 인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구속된 이유는 1991년 1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준비위원회의 결성과 활동에 따른 탄압이었다. 1991년 11월에 석방되어 보니,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결성과 전민련 해산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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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하이라이트 내용: 2월중순 통합 논의(연대 수준)부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창립 과정
4.19 참여와 대학 재학 시 동아일보 기자가 되는 과정, 자유언론수호선언 참여 과정, 민통련 창립과정, 85년 민통련 활동, 86년 개헌현판식투쟁과 5.3인천민중항쟁, 민통련 탄압기 회고, 국본과 6월항쟁,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에 대한 회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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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택
김희택은 1950년 3월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에서 출생하여 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안병무 교수의 영향을 받아 1972년 한국신학대 신학과에 진학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으로 복학했으며, 3학년이던 1978년 총학생회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6일 민주회복선언문 시위로 구속 및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79년 7월 석방된 후 윤한봉의 권유로 광주에서 청년운동에 참여했다. 그해 11월 28일 광주와 전남 사회단체들의 성명서 발표를 준비한 것을 이유로 수배를 받아 서울로 올라가서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았다. 1980년 3월 복학은 되었으나, 학교에 가지 못해 두 번째 제적되었다.
김희택은 1981년 장명국이 인수한 금성냉동학원에 총무와 강사로 취업하여 근무하면서 석탑출판사 사원이던 전 민성전자 노동조합 부위원장 조명자를 만났고 1983년에 결혼했다. 또한 장명국과 친분으로 금성냉동학원을 자주 방문하던 김근태와 인연을 맺었다. 김희택은 노동운동을 하려 했으나, 조명자의 권유로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대변인으로 참여하고, 1985년 3월 21일 제4차 총회에서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그해 7월과 8월 김근태를 비롯해 핵심 간부들이 대거 구속되고 고문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8월 10일 개최된 제5차 정기총회에서 부의장에, 1986년 3월 1일 개최된 제6차 총회에서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수배 상태에서 활동하다 1986년 6월 19일 구속되었고, 1987년 3월 재판 출두 호송차가 교통사고가 나면서 장기 치료를 받기 위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김희택은 1987년 8월 25일 제9차 총회에서 두 번째로 의장에 선출되었다.
김희택은 1989년 1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해산을 집행한 마지막 사무처장이었다. 민통련을 이어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 참여하여 총무국장, 사무차장, 편집실장, 대변인을 역임했고, 1990년 4월에는 사무처장을 맡았다. 1990년 8월에는 범민족대회 남한 추진본부 정책기획실장을 맡았다. 1991년 1월 24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 준비위원회의 사건으로 구속되어 1992년 7월 석방되었다. 1994년 김근태 등을 중심으로 정당 참여를 준비하던 모임에 참여했고, 1995년 통합추진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이후 정치 세력화를 위한 활동을 모색하다가 조명자의 건강 이상에 의해 광주로 낙향했다. 그리고 2003년 7월부터 2006년 9월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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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박계동은 1952년 12월(실제 1952년 8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호적상이고, 실제 출생한 곳은 부산시 영도이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었다가 광복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부산시 영도로 피난을 가서 공무원이 되었고, 가족도 그곳으로 이사했다. 박계동의 가문은 양가 모두 유림의 일파로 전통을 강하게 고수했으며, 현재도 그 유산이 유지되고 있다. 외가는 삼성가와 혼맥이 형성되었다. 그 인연으로 가족이 상경했고, 그로 인해 전농초등학교, 보성중, 보성고를 졸업했다. 보성중에 재학하던 중 3선개헌 반대운동이 발생했는데, 시위에 참여했다. 보성중과 보성고는 서울시 혜화동 1번지에 위치해 대학가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1971년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했으나, 병영화에 반대하는 교련반대 시위가 발생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자퇴했다.
박계동은 1972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봄, 보성고 동문 신입생환영회에서 웅변반 선배이자 정치외교학과 선배 윤석철을 만났다. 윤석철은 민족이념연구회 회장이었는데, 바로 서클로 데려갔다. 이를 계기로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973년 야생화사건으로 지인들이 구속되고 고문받은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민우지사건을 보면서 현실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고려대 학생운동은 1971년 교련반대시위와 1973년 두 사건으로 인해 위축된 상태였다. 민족이념연구회 활동 등으로 인해 박계동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주시를 받았다. 민족이념연구회는 고려대 총학생회를 적극 활용하기로 하고, 1974년 5월 30일 선거에서 회장을 당선시킨다. 박계동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 되었다. 따라서 1974년 2학기부터는 민족이념연구회 구성원이 총학생회를 운영하는 형국이었고, 그로 인해 수차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중 10월 10일 구국선언문 시위로 연행되면서 총무부장을 사임하고, 대외적으로 휴지기에 들어갔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다음에도 학생 시위가 발생했는데, 5월 23일 발발한 전국학생연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및 제적되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유죄판결을 받고 김해교도소에서 호된 옥살이를 하다가 1977년 7월 17일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연계되어 있었고, 고려대 앞에서 황토골 서점을 운영했다. 1978년 5월 12일 기독교회관에서 창립한 민주청년인권협의회(청협)에 참여했다. 청협은 정문화, 김학민, 홍성엽, 장만철, 조성우, 문국주, 배경순 등이 중심이었는데, 주축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었다. 청협 참가자들은 출범과 동시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탈퇴 협박과 폭행을 당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식 주인공 홍성엽도 청협 회원이다. 이 행사에도 참석했는데, 도주하여 연행을 모면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 복학하여 복학생대책협의회를 만들고, 총학생회 선거와 출범에 관여했다. 또한 민주화 추진을 위한 제반 집회와 시위 등 여러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김내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박계동은 이때부터 1982년 4월까지 경북 의성, 천주교 안동교구 마리스타수도원, 다미안병원, 루카촌 등으로 도피했다. 그 와중에 1982년 1월 14일 정순철과 일본 밀항을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1982년 3월 18일 자수 형식으로 구속되어 옥인동에서 조사받았고, 서울구치소에서 재판받은 뒤 김해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83년 4월 5일 석방되었다.
1983년 5월 21일 결혼했다. 그런데 이전부터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이 준비되고 있었다. 박계동은 김근태, 장영달 등과 창립선언문의 기조를 두고 출범 당일까지 논의할 정도로 깊이 관여했다. 창립선언문 작성에는 여러 사람이 관련되었을 것인데, 최종적으로 문안을 확정한 사람은 김근태였다. 박계동은 9월 30일 민청련이 출범할 때 홍보부장을 맡았다. 홍보부장은 정부와 언론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업무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발행하고 안전하게 배포하는 일이었다. 재정 확보를 위해 민중미술 열두마당 달력과 민주 수첩 등을 제작하여 판매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각종 출판물 발행을 이유로 수시로 조사받고 구류처분을 받았다. 박계동이 활동하는 데는 여러 스폰서의 도움이 컸다.
1984년 6월 29일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창립되었다. 민민협 창립에는 민청련의 견해가 크게 작용했다. 박계동은 민청련에서 파견하는 형식으로 민민협의 홍보 업무를 맡았다. 민민협은 ≪민중의 소리≫를 기관지로 발행했다. 원고는 이부영, 김근태, 장기표, 이을호 등 여러 사람이 작성했다. 그러던 중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창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민통련 창립을 두고 많은 논의와 이견이 전개되었으나, 민주화운동 전선의 구심체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민통련은 1985년 3월 29일 결성되었는데, 박계동은 홍보 간사로 참여했다. 이후 홍보국장, 조직국장 등을 역임했다. 민통련은 지역까지 조직 혹은 연결 기반을 구축했고, 대학까지 연결되었다. 민통련 활동의 최대 의제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민통련은 초반에는 신민당 개헌 현판식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1986년 3월 23일 부산 현판식 집회가 성공리에 전개되는 것을 보고, 적극적 참여로 입장을 전환했다. 지역을 순회하며 전개된 개헌 투쟁은 인천5·3민주항쟁에서 격렬하게 펼쳐졌다. 박계동은 민통련 명의의 유인물과 홍보물을 천신만고 끝에 현장으로 반입했는데, 큰 관심을 받았다. 수배 상태에서도 전주, 마산 집회에 나타나 신출귀몰하는 이미지를 얻었다. 박계동은 성남에 방을 얻어 이우재, 안희대와 숨어 있었는데, 수배는 1988년 7월 29일 해제되었다. 2년 이상 장기간 수배 상태에서 활동하다가 자수했고, 재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서 11월 25일 석방되었다. 그리고 12월 20일 사면 복권되었다.
출소하자 곧바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창립에 참여하고, 초대 대변인이 되었다. 민청련과 민통련은 구성원들이 친밀한 조직이었지만, 전민련은 달랐다. 전민련은 계파들의 연합체로 내적 갈등이 심했다. 박계동은 CNP 논쟁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순수 민주화운동’에서 이탈하는 것을 경계하고 멀리했다. 그러다 합법 정당 결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동의하면서 전민련을 탈퇴했다. 1991년 결성된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이견을 조율하고 협의하는 역할을 했다. 재야운동에서 정치계로 진출할 것을 결심했던 것에는 김근태의 영향이 컸다. 그리하여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정치계로 영역을 바꿔 활동했다. 정치인으로 가장 크게 조명을 받았던 사건은 노태우 비자금 폭로였으며, 여기에는 공개되지 않은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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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섭
박우섭은 1955년 7월(실제 1954년 12월)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서 출생하여 용산중과 용산고를 졸업했다. 1972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미생물학과에 입학했으며, YFC 출신으로 구성된 독서토론 모임 한다발에 참여했고, 약대 선배 민일기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해 활동했다. 1974년 4월 3일 시위로 연행되었다가 40일 만에 훈방으로 석방되었다. 1975년 민청학련 사건 1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로 연행되어 서울대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는데, 얼마 후 제명 처리되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군 복무하고, 1976년 10월 대한항공 고졸 사원으로 입사했다. 군 복무와 대한항공 근무 시기에도 연극단체와 연계되어 활동했다. 1977년 성균관대 야간 경제학과로 편입했으나, 서울대 제명이 드러나 취소되었다. 1978년에는 연우무대를 창단하는 데 참여한다. 1978년 10월 시위로 수배를 당한 이우재와 성욱을 숨겨주고 활동비를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범인 은닉죄로 연행되었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대한항공에서 해직된다. 1979년 연우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3월 서울대에 복학했다.
서울의 봄 국면에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복학생 그룹은 서울역 진출을 지지한 입장이었고, 의미 있는 역할로 참여했다.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되면서 수배되었다. 수배가 장기화할 것으로 판단되어 대방동에 월세를 얻어 생활했는데, 여러 수배자가 함께 생활했다. 수배 상태에서 반도상사 노동조합 연극반을 지도하다가 박인배에게 인계했다. 이때 만난 반도상사 노동자와 1982년 여름에 결혼했고, 인천시 구월동 소재 주공아파트를 얻어 생활했다. 이 집에도 수배자들이 함께 생활했다. 구월동 주공아파트에서는 다양한 활동의 거점이 되었는데, 여러 종의 유인물이 제작되었다.
박우섭은 1983년 2월 서울대 후배 정진태가 연행되면서 다시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그해 4월 자수 형식으로 경찰에 출두했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생활하다가 1983년 7∼8월경 상경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곧바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에 참여했다. 박우섭과 김근태의 인연은 신동수를 매개로 1979년에 형성되었고, 인재근과의 인연도 동일방직 연극 지도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을 매개로 형성되어 있었다. 민청련 결성은 과거 함께 활동했거나 인연이 있던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박우섭은 민청련 총무부장을 맡았다. 민청련은 9월 30일 출범할 때 집행부가 구속될 것으로 보았는데, 아무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아 정세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활동했다.
민청련은 기존의 사회단체와 달리 집행부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기관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하여 정세와 사회운동의 의제를 전달했다. 민청련의 운영과 활동 비용은 계반 회비, 기관지 판매 수익금, 그리고 그림 등의 판매로 충당되었다. 1983년 12월 송년회를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개최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로 개최되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후 박우섭은 민청련 부의장, 운영위원회 사무국장, 공동의장(1988.∼1990.) 등을 역임하면서 1990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 1986년 3월에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그해 7월까지 수감되었다.
박우섭은 민청련의 직책과 더불어 1986년 8월부터 1990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하면서 대변인과 사무처장 등을 맡았다. 민통련을 결성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는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민청련 내에서도 활동 방향과 성격을 두고 열띤 내부 노선 논쟁이 전개되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사실상 총무국장의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6월 24일 연행되었다가 7월 초에 석방되었다. 1987년 10월 30일 경찰에 연행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88년 6월 9일 석방되었다. 그리고 1989년 3월에 남서울 민청련 위원장을 맡았다. 민청련과 민통련 활동이 중첩되었던 기간은 1987년 후반부터인데, 민통련 활동에 보다 무게중심을 두고 활동했다.
1990년 4월 21일부터 6월경까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변인을 지냈다. 이 무렵 전민련은 정치 세력화와 정당 결성을 두고 연이어 탈퇴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결속력과 영향력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었다. 박우섭도 1990년 6월 전민련을 탈퇴하고 범민주통합수권정당 촉구를 위한 추진회의 간사를 맡았다. 이후 활동은 사실상 정당과 정치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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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철 70년대 전북지역 학생운동 현황, 80년 5월 당시 전북대의 상황과 내부논의 상황, 84년 전북지역운동을 만들어 가면서 했던 고뇌들,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를 만드는 과정 , 85년 민통련출범과 지역운동협의회 건설과정, 86년 민주헌법쟁취과정에서의 지역, 5.3인천민중항쟁과 민국련사건회고, 5.3이후 민통련 탄압과 지역운동협의회 활동, 4.13 호헌조치 이후 6월 항쟁시 전북지역운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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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식민주통일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 통합과정 회고, 민통련과 지역운동협의회 관계, 5.3인천민중항쟁과 정파들의 활동 소개, 민통련 탄압시기 지역운동협의회와 ‘민중의 소리’발행, 87년 2.7, 3.3, 국본건설과 6월 항쟁시 지역운동협의회, 87년 8월 민통련 통일강연과 문선대, 전민련 건설시 재야 원로그룹의 소외에 대한 평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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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재긴급조치 9호위반과 인천지역운동,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건설과 인사연 조직활동, 민통련창립과 지역운동협의회 건설과정 회고, 86년 민주헌법쟁취위원회 구성과 개헌 현판식, 5.3인천민중대회 현장 회고, 5.3인천민중대회 운동내분에 대한 평가, 87대선 민통련 후보전술에 대한 평가, 인사연에서 진행된 비판적지지 결정과정과 분열, 전민련건설과 인사연 해소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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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정
임채정은 1941년(실제 1940년) 5월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현풍리에서 출생하여 충남 보은과 서울 그리고 광주를 걸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서중과 광주제일고를 졸업했다. 1960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해 4·19혁명에 참여했다. 1964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몇몇 직업을 갖다가 1967년 7월 동아일보사가 막 창간한 월간지 <여성동아>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일간지 제2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던 중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1975년 10월 해직되었다.
해직 이후 출판업계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78년 6월 김지하 시인 석방 미사에 참여하여 구류 처분을 받은 일 등을 비롯해 여러 차례 연행되었고, 1979년 11월 24일 전개된 일명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는 비용을 조달하는 등 깊이 관여되어 구속되었다. 이 일로 군사재판을 받았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81년 1월 석방되었다. 그러므로 1980년 민주화의 봄과 5·18민주화운동 국면 등에는 감옥에 있었다. 1983년 정치활동 규제 대상에서 해제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교육신보> 주간을 맡고 있었다.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여 청년들과 마지막까지 연대했다. 1984년 6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고, 1984년 10월 민주통일국민회의 출범에 참여해 민생문제위원장을 역임했다. 활동의 비중은 민주통일국민회의에 있었다. 1984년 12월 민주언론협의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1985년 3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에 참여하여 정책기획실장을 맡았다. 1986년 전국에서 펼쳐진 개헌투쟁에 참여했는데, 특히 광주의 개헌투쟁에 깊이 관여되었다. 그리고 인천5·3민주항쟁 관련으로 수배되어 광주 등으로 도피했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았다. 1987년 4월 19일 제27주년 4·19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대표로 활동한 것을 이유로 구속되었고, 1987년 8월 5일 서울교도소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6월민주항쟁 덕분에 빨리 풀려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운동 국면에서는 민통련의 입장이었던 비판적 지지론을 취했다. 김대중과 특별한 인연은 없었으나, 한 잡지에 실린 김대중의 인터뷰에서 전봉준을 제일 존경한다고 한 것을 보고 지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국면은 민주화운동 진영 내 입장의 차이가 발생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1988년 평화민주당이 위기에 놓였을 때 재야인사들이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를 결성해 입당할 때 함께 했다. 1992년에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2008년 17대까지 연임했고, 2006년 제17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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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서울대 법대입학 후 본격적 반정부시위활동 회고, 전태일 분신사건과 전태일 평전작업,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과 김대중씨와의 관계, 민통련 창립과정과 CNP 논쟁, 86년 5.3인천민중항쟁 현장상황과 운동의 분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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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달
장영달은 1948년 9월 전라북도 남원군 송동면에서 출생하여 함안중과 전주고를 졸업했다. 1969년 국민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1969년 8월부터 1972년 6월까지 군 복무했는데, 마지막 10개월은 십자성 부대원으로 베트남의 전장에 있었다. 베트남의 전장에서 세례를 받았고, 1972년 9월 복학한 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에 가입해 국민대 회장과 전국 기획실장을 맡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9월 15일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7년 형을 선고받는데, 부산교도소를 걸쳐 마산교도소에서 1975년 2월 16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국민대에 복학을 요구했으나 수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1975년 10월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당국은 1975년 10월 17일 학내 시위를 부추긴 혐의로 구속했으나 이와는 무관하고, 인민혁명당 사건은 조작이라고 한 점을 문제 삼았다. 당국은 1976년 11월 1년 형기를 채워 석방될 무렵이 되자 각서와 반성문 작성을 요구했다. 장영달이 이를 거부하자, 정지되었던 형을 재집행했다. 그로 인해 6년 11개월을 복역하게 되었고, 1981년 8월 14일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마산교도소와 목포교도소를 걸쳐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5·18민주화운동이 전개될 당시에는 목포교도소에 있었다.
1981년 말부터 약 6년간 풀무원 대리점을 운영했고, 1982년 4월 결혼했다. 1983년 2월 정치활동 규제 대상에서 해제되었다.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될 때 이를 준비하던 논의의 막바지에 결합했다. 김근태는 이때 처음 대면했으며, 민청련 초대 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84년 8월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1984년 4·19혁명 기념식 개최로 입원할 정도로 경찰에 구타당했고, 8월 15일 민족해방 39주년 기념식으로 구류 처분으로 받았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1985년 3월 결성되었지만, 장영달은 민통련이 확대 개편되었던 9월 합류한다. 민통련 결성을 앞두고 이루어진 논의는 파악하고 있었다. 장영달이 민통련에 참여한 시점은 민청련이 민통련 참가를 결정하면서였다. 1986년에 들어 민통련 총무국장이 되었고, 인천5·3민주항쟁으로 수배를 받았으며, 이후 사무차장을 역임했다. 1986년 9월 검거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1987년 6월민주항쟁 직후인 7월 8일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었는데, 같은 날 석방된 문익환 목사 등과 이한열 장례식에 참가했다. 1987년 8월 민통련 경기 북부지부를 창립하고 의장에 선임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는 민통련의 입장과 같이 비판적 지지론을 취했다. 1988년 2월 재야인사들과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1988년 12월 20일 사면 복권되고 피선거권 등 공민권 제약이 해제되었다. 1988년 이후 활동은 사실상 정당과 정치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