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Embed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URL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이메일 공유
박우섭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박우섭
- 면담자
- 정호기,이영재
- 구술일자
- 2025년 6월 24일,25일
- 구술장소
- 민주화운동기념관 교육실
- 구술시간
- 07:03:40
구술컬렉션 > 재야운동 > 단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5.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오추리 출생
1960.4.-1972.2. 당진초등학교,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 졸업
1972.3.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생물학과 입학. 연극반 활동
1974.4.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 40일 만에 훈방. 무기정학
1975.4. 긴급조치 9호 위반 연행. 무기정학, 제명 처분
1975.-1976. 군 복무
1978.10. 수배자 은닉 혐의와 자금 제공을 이유로 기소유예. 대한항공 해직
1979.10.-1980.3. 연우무대 연극 공연. ‘한 줌의 흙’, ‘장산곶매’ 공연
1980.3.-1983.4. 서울대 복학.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장기 수배 생활. 1994. 졸업
1983.9.-1990.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총무부장, 부의장, 공동의장, 운영위원회 사무국장
1986.3.-1986.7. 집시법 위반으로 수감
1986.8.-1990.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대변인, 사무처장 등
1987.10.-1988.6.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
1989.3. 남서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위원장
1990.4.-1990.6.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대변인
1990.6. 범민주 통합추진회의 간사
1990.10. 국군보안사령부 사찰 대상으로 공개
2001.12..20.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제34차에서 관련자로 인정
2002.7.-2006.6. 제19대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2010.7.-2018.6. 제21대, 제22대 인천광역시 남구청장
2025. 현재 국민주권전국회의 상임의장, (사)기본사회 인천본부 상임고문
- 구술내용 요약
-
박우섭은 1955년 7월(실제 1954년 12월)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서 출생하여 용산중과 용산고를 졸업했다. 1972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미생물학과에 입학했으며, YFC 출신으로 구성된 독서토론 모임 한다발에 참여했고, 약대 선배 민일기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해 활동했다. 1974년 4월 3일 시위로 연행되었다가 40일 만에 훈방으로 석방되었다. 1975년 민청학련 사건 1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로 연행되어 서울대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는데, 얼마 후 제명 처리되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군 복무하고, 1976년 10월 대한항공 고졸 사원으로 입사했다. 군 복무와 대한항공 근무 시기에도 연극단체와 연계되어 활동했다. 1977년 성균관대 야간 경제학과로 편입했으나, 서울대 제명이 드러나 취소되었다. 1978년에는 연우무대를 창단하는 데 참여한다. 1978년 10월 시위로 수배를 당한 이우재와 성욱을 숨겨주고 활동비를 지원한 사실이 드러나 범인 은닉죄로 연행되었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대한항공에서 해직된다. 1979년 연우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 3월 서울대에 복학했다.
서울의 봄 국면에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복학생 그룹은 서울역 진출을 지지한 입장이었고, 의미 있는 역할로 참여했다.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되면서 수배되었다. 수배가 장기화할 것으로 판단되어 대방동에 월세를 얻어 생활했는데, 여러 수배자가 함께 생활했다. 수배 상태에서 반도상사 노동조합 연극반을 지도하다가 박인배에게 인계했다. 이때 만난 반도상사 노동자와 1982년 여름에 결혼했고, 인천시 구월동 소재 주공아파트를 얻어 생활했다. 이 집에도 수배자들이 함께 생활했다. 구월동 주공아파트에서는 다양한 활동의 거점이 되었는데, 여러 종의 유인물이 제작되었다.
박우섭은 1983년 2월 서울대 후배 정진태가 연행되면서 다시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그해 4월 자수 형식으로 경찰에 출두했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생활하다가 1983년 7∼8월경 상경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곧바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에 참여했다. 박우섭과 김근태의 인연은 신동수를 매개로 1979년에 형성되었고, 인재근과의 인연도 동일방직 연극 지도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을 매개로 형성되어 있었다. 민청련 결성은 과거 함께 활동했거나 인연이 있던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박우섭은 민청련 총무부장을 맡았다. 민청련은 9월 30일 출범할 때 집행부가 구속될 것으로 보았는데, 아무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아 정세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활동했다.
민청련은 기존의 사회단체와 달리 집행부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기관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하여 정세와 사회운동의 의제를 전달했다. 민청련의 운영과 활동 비용은 계반 회비, 기관지 판매 수익금, 그리고 그림 등의 판매로 충당되었다. 1983년 12월 송년회를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개최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로 개최되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후 박우섭은 민청련 부의장, 운영위원회 사무국장, 공동의장(1988.∼1990.) 등을 역임하면서 1990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 1986년 3월에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그해 7월까지 수감되었다.
박우섭은 민청련의 직책과 더불어 1986년 8월부터 1990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하면서 대변인과 사무처장 등을 맡았다. 민통련을 결성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는 치열한 논쟁과 토론이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민청련 내에서도 활동 방향과 성격을 두고 열띤 내부 노선 논쟁이 전개되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사실상 총무국장의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6월 24일 연행되었다가 7월 초에 석방되었다. 1987년 10월 30일 경찰에 연행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1988년 6월 9일 석방되었다. 그리고 1989년 3월에 남서울 민청련 위원장을 맡았다. 민청련과 민통련 활동이 중첩되었던 기간은 1987년 후반부터인데, 민통련 활동에 보다 무게중심을 두고 활동했다.
1990년 4월 21일부터 6월경까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변인을 지냈다. 이 무렵 전민련은 정치 세력화와 정당 결성을 두고 연이어 탈퇴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결속력과 영향력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었다. 박우섭도 1990년 6월 전민련을 탈퇴하고 범민주통합수권정당 촉구를 위한 추진회의 간사를 맡았다. 이후 활동은 사실상 정당과 정치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용산중
- 용산고
- 서울대 미생물학과
- YEC
- 한다발
- 문리대 연극반
-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
- 1974년 10월 문리대 도서관 점거 농성
- 1975년 4월 3일 시위
- 대한항공
- 연우무대
- 민주청년인권협의회(민청협)
- 공장의 불빛
- 장산곶매
- 무등산 타잔
- 애오개 소극장
- 서울의 봄
- 서울역 회군
- 김대중내란음모사건
- 대방동
- 국풍 81
- 구월동
- 결혼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 계반 조직
- 송년회
-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
- 4·19혁명 기념식
- 광주백서
- 기층민중
- 2·12총선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 민주화추진협의회
- CNP 논쟁
- AB 논쟁
- ≪민주화의 길≫
- ≪민중신문≫
- 남영동 대공분실
- 직선제 운동
- 6월민주항쟁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지역운동협의회
- 1987년 대통령 선거
- 비판적 지지론
- 독자후보론
- 후보 단일화론
- 개운사
- 평화민주당(평민당)
- 건국대 강연
- 남서울민청련
- 3당 야합
- 합법정당 논쟁
-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
- 3당 합당
- 한겨레민주당
- 방북
-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 범민주통합수권정당 촉구를 위한 추진회의(통추)
- DJP연합
- 1997년 정권교체
- 인천 남구청장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민청련 운영과 활동의 특성과 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