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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박계동
- 면담자
- 정호기,이영재
- 구술일자
- 2025년 7월 14일,15일,23일
- 구술장소
- 민주화운동기념관 교육실
- 구술시간
- 09:16:03
구술컬렉션 > 재야운동 >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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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2.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남사마을 출생
- 1971. 2. 서울전농초등학교, 보성중학교, 보성고등학교(51회) 졸업
1972. 3.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입학
1974. 아시아청년회 한국 대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총무부장. 수회 연행
1975. 5. 긴급조치 9호 위반 구속,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제적(7. 3.)
1977. 7. 17. 석방. 고려대 앞에서 황토골 서점 운영
1980.3.-1982.4. 사면 복권, 복학. 지명수배 제적. 도피하다 검거, 구속. 1983. 4. 5. 석방
1983.9.-1984.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초대 홍보부장, 홍보위원장 등을 역임
1984.6.-1985.3. 민중민주운동협의회 홍보 담당
1985.3.-1989.1.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홍보 간사, 홍보국장, 조직국장
1988. 12.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추진위원회 투쟁기획국장
1989. 1.-1990.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대변인
1990. 국군보안사령부 사찰 대상으로 공개됨
1991. 야권 통합추진위원회 위원. 야권과 민주당 통합에 기여
1992.-1996. 제14대 국회의원(서울 강서구 갑)
1993. 고려대학교 졸업
1995. 10.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 폭로
1998.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인정
2004.5.-2008.5.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송파구을)
2008.7.-2010.6. 제24대 국회 사무총장
2015.7.- 한국택시마카롱협동조합 이사장
- 구술내용 요약
-
박계동은 1952년 12월(실제 1952년 8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호적상이고, 실제 출생한 곳은 부산시 영도이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넘어갔고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었다가 광복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부산시 영도로 피난을 가서 공무원이 되었고, 가족도 그곳으로 이사했다. 박계동의 가문은 양가 모두 유림의 일파로 전통을 강하게 고수했으며, 현재도 그 유산이 유지되고 있다. 외가는 삼성가와 혼맥이 형성되었다. 그 인연으로 가족이 상경했고, 그로 인해 전농초등학교, 보성중, 보성고를 졸업했다. 보성중에 재학하던 중 3선개헌 반대운동이 발생했는데, 시위에 참여했다. 보성중과 보성고는 서울시 혜화동 1번지에 위치해 대학가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1971년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했으나, 병영화에 반대하는 교련반대 시위가 발생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자퇴했다.
박계동은 1972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봄, 보성고 동문 신입생환영회에서 웅변반 선배이자 정치외교학과 선배 윤석철을 만났다. 윤석철은 민족이념연구회 회장이었는데, 바로 서클로 데려갔다. 이를 계기로 사회과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973년 야생화사건으로 지인들이 구속되고 고문받은 것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 민우지사건을 보면서 현실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고려대 학생운동은 1971년 교련반대시위와 1973년 두 사건으로 인해 위축된 상태였다. 민족이념연구회 활동 등으로 인해 박계동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주시를 받았다. 민족이념연구회는 고려대 총학생회를 적극 활용하기로 하고, 1974년 5월 30일 선거에서 회장을 당선시킨다. 박계동은 총학생회 총무부장이 되었다. 따라서 1974년 2학기부터는 민족이념연구회 구성원이 총학생회를 운영하는 형국이었고, 그로 인해 수차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중 10월 10일 구국선언문 시위로 연행되면서 총무부장을 사임하고, 대외적으로 휴지기에 들어갔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다음에도 학생 시위가 발생했는데, 5월 23일 발발한 전국학생연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및 제적되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의 유죄판결을 받고 김해교도소에서 호된 옥살이를 하다가 1977년 7월 17일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연계되어 있었고, 고려대 앞에서 황토골 서점을 운영했다. 1978년 5월 12일 기독교회관에서 창립한 민주청년인권협의회(청협)에 참여했다. 청협은 정문화, 김학민, 홍성엽, 장만철, 조성우, 문국주, 배경순 등이 중심이었는데, 주축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었다. 청협 참가자들은 출범과 동시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탈퇴 협박과 폭행을 당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식 주인공 홍성엽도 청협 회원이다. 이 행사에도 참석했는데, 도주하여 연행을 모면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 복학하여 복학생대책협의회를 만들고, 총학생회 선거와 출범에 관여했다. 또한 민주화 추진을 위한 제반 집회와 시위 등 여러 활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김내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지명수배를 받았다. 박계동은 이때부터 1982년 4월까지 경북 의성, 천주교 안동교구 마리스타수도원, 다미안병원, 루카촌 등으로 도피했다. 그 와중에 1982년 1월 14일 정순철과 일본 밀항을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1982년 3월 18일 자수 형식으로 구속되어 옥인동에서 조사받았고, 서울구치소에서 재판받은 뒤 김해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83년 4월 5일 석방되었다.
1983년 5월 21일 결혼했다. 그런데 이전부터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이 준비되고 있었다. 박계동은 김근태, 장영달 등과 창립선언문의 기조를 두고 출범 당일까지 논의할 정도로 깊이 관여했다. 창립선언문 작성에는 여러 사람이 관련되었을 것인데, 최종적으로 문안을 확정한 사람은 김근태였다. 박계동은 9월 30일 민청련이 출범할 때 홍보부장을 맡았다. 홍보부장은 정부와 언론을 상대하는 일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업무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발행하고 안전하게 배포하는 일이었다. 재정 확보를 위해 민중미술 열두마당 달력과 민주 수첩 등을 제작하여 판매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 각종 출판물 발행을 이유로 수시로 조사받고 구류처분을 받았다. 박계동이 활동하는 데는 여러 스폰서의 도움이 컸다.
1984년 6월 29일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창립되었다. 민민협 창립에는 민청련의 견해가 크게 작용했다. 박계동은 민청련에서 파견하는 형식으로 민민협의 홍보 업무를 맡았다. 민민협은 ≪민중의 소리≫를 기관지로 발행했다. 원고는 이부영, 김근태, 장기표, 이을호 등 여러 사람이 작성했다. 그러던 중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창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민통련 창립을 두고 많은 논의와 이견이 전개되었으나, 민주화운동 전선의 구심체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민통련은 1985년 3월 29일 결성되었는데, 박계동은 홍보 간사로 참여했다. 이후 홍보국장, 조직국장 등을 역임했다. 민통련은 지역까지 조직 혹은 연결 기반을 구축했고, 대학까지 연결되었다. 민통련 활동의 최대 의제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민통련은 초반에는 신민당 개헌 현판식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1986년 3월 23일 부산 현판식 집회가 성공리에 전개되는 것을 보고, 적극적 참여로 입장을 전환했다. 지역을 순회하며 전개된 개헌 투쟁은 인천5·3민주항쟁에서 격렬하게 펼쳐졌다. 박계동은 민통련 명의의 유인물과 홍보물을 천신만고 끝에 현장으로 반입했는데, 큰 관심을 받았다. 수배 상태에서도 전주, 마산 집회에 나타나 신출귀몰하는 이미지를 얻었다. 박계동은 성남에 방을 얻어 이우재, 안희대와 숨어 있었는데, 수배는 1988년 7월 29일 해제되었다. 2년 이상 장기간 수배 상태에서 활동하다가 자수했고, 재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서 11월 25일 석방되었다. 그리고 12월 20일 사면 복권되었다.
출소하자 곧바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창립에 참여하고, 초대 대변인이 되었다. 민청련과 민통련은 구성원들이 친밀한 조직이었지만, 전민련은 달랐다. 전민련은 계파들의 연합체로 내적 갈등이 심했다. 박계동은 CNP 논쟁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순수 민주화운동’에서 이탈하는 것을 경계하고 멀리했다. 그러다 합법 정당 결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동의하면서 전민련을 탈퇴했다. 1991년 결성된 야권통합추진위원회에서 이견을 조율하고 협의하는 역할을 했다. 재야운동에서 정치계로 진출할 것을 결심했던 것에는 김근태의 영향이 컸다. 그리하여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정치계로 영역을 바꿔 활동했다. 정치인으로 가장 크게 조명을 받았던 사건은 노태우 비자금 폭로였으며, 여기에는 공개되지 않은 일화가 있다.
- 남사리 유림
- 보성중
- 보성고
- 동국대
- 고려대
- 1971년 교련반대 투쟁
- 민족이념연구회
- 유신헌법
- 야생화사건
- 민우지사건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학련)
- 인민혁명당(인혁당)
- 긴급조치 4호
- 아시아청년회의
- 고려대 총학생회
- 1974년 10월 10일 구국선언문
- 긴급조치 9호
- 전국학생연맹
- 김해교도소
- 민주청년인권협의회(청협)
- YWCA 위장결혼식
- 목요기도회
- 남민전
- 황토골 서점
- 서울의 봄
- 복학생대책협의회
- 광화문 집회
- 서울역 회군
- 성북서 포위
- 5·16규탄대회
- 비상계엄 전국 확대
- 김대중내란음모사건
- 춘산농원
- 마리스타수도원
- 다미안병원
- 루카촌
- 밀항
- 송림 주공아파트
-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 부산미문화원방화
- 옥인동 수사본부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 창립선언문
- ≪민주화의 길≫
-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 ≪민중의 소리≫
- 서울구치소
- 신민당 개헌현판식
- 인천5·3민주항쟁
- 직선제 개헌투쟁
- 세진인쇄소
- 대통령 선거
-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 합법정당 논쟁
- 야권 통합추진위원회
- 야권 단일화
- 노태우 비자금
- 12·12쿠데타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민청련과 민통련 기관지 발간, 민청련의 성격과 역할 및 연합체운동에 미친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