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Embed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URL 퍼가기
하단의 내용을 복사해서 퍼가세요.
이메일 공유
임채정
사업개요
- 1980년대 연합체의 탄생과 활동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구술사료 수집을 지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2025년 제8차 년도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연합체운동을 주제로 구술사료를 수집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앞서 200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주제로 관련 인사 5명(김종철, 장기표, 이광철, 이명식, 이우재)의 구술을 수집한 바 있다. 이른바 연합체운동은 1980년대 전반기에 나타났으며, 1990년대까지 여러 유형과 형태로 변화하면서 이어졌다. 연합체운동의 흐름에서 중요하게 파악되는 단체는 1983년 결성된 민주화운동청년단체연합(민청련), 1985년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그리고 1989년 결성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다. 민청련의 성격은 연합체는 아니었으나, 이후 연합체운동을 태동하고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통련은 1982년부터 다양한 부문에서 결성되었던 민주화운동단체들이 연대하고 구심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과 필요성에서 등장했다. 전민련은 1987년 대통령 선거 국면을 거치면서 민통련의 역할과 위상이 약화하고, 부문 운동별로 단체 결성과 활동이 활성화됨에 따라서 동력을 재결집하고 새로운 구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결성되었다. 그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이번 구술사료 수집은 연합체운동의 참여 인물들(박우섭, 임채정, 장영달, 박계동, 김희택, 권형택)을 대상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를 포괄해서 다루었다. 주요 주제는 연합체의 결성과 변화, 활동의 주요 쟁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특성이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임채정
- 면담자
- 정호기,이영재
- 구술일자
- 2025년 7월 2일
- 구술장소
- 민주화운동기념관 교육실
- 구술시간
- 03:57:50
구술컬렉션 > 재야운동 > 단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40. 전라남도 나주시 출생
1948.4.-1960.2. 보은 삼산초등학교 입학. 서울을 거쳐 광주수창초등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1960.3.-1964.2. 고려대학교 법학과 재학, 졸업
1967.7.-1974. 동아일보사 입사, 월간지에서 근무. 일간지 제2사회부 근무
1975.3.-1975.10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결성, 상임특별위원장. 해임
1978. 6. 원주에서 개최된 ‘김지하 시인 석방을 위한 미사’ 참여로 구류 처분
1978. 10. 30. 경찰에 연행
1979. 11. 24.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 반대 국민회의(일명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공동대표, 구속(12.)
1980.1.-1981.1.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 석방. 정치활동 규제 대상자. 항소
1983. 정치활동 규제 해금. 교육신보 주간
1983. 9.-1989.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지도위원
1984. 6.-1984.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결성에 참여
1984. 10. 민주통일국민회의 출범에 참여. 민생문제위원장
1984. 12. 민주언론협의회 창립에 참여
1985.3.-1985.11.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결성에 참여. 정책기획실장
1987. 4 .19. 제27주년 4·19민주화운동 기념식으로 구속
1987. 8. 5. 서울교도소에서 석방
1988. 2. 재야인사 91명과 평화민주당 입당
1992.9.-2008.5. 제14-17대 국회의원(서울 노원구을, 노원구병)
2006.∼2008. 5. 제17대 국회의장
- 구술내용 요약
-
임채정은 1941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현풍리에서 출생하여 충남 보은과 서울 그리고 광주를 걸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서중과 광주제일고를 졸업했다. 1960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해 4·19혁명에 참여했다. 1964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몇몇 직업을 갖다가 1967년 7월 동아일보사가 막 창간한 월간지 <여성동아>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일간지 제2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던 중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 참여하여 1975년 10월 해직되었다.
해직 이후 출판업계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78년 6월 김지하 시인 석방 미사에 참여하여 구류 처분을 받은 일 등을 비롯해 여러 차례 연행되었고, 1979년 11월 24일 전개된 일명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는 비용을 조달하는 등 깊이 관여되어 구속되었다. 이 일로 군사재판을 받았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81년 1월 석방되었다. 그러므로 1980년 민주화의 봄과 5·18민주화운동 국면 등에는 감옥에 있었다. 1983년 정치활동 규제 대상에서 해제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교육신보> 주간을 맡고 있었다.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여 청년들과 마지막까지 연대했다. 1984년 6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결성에 참여했고, 1984년 10월 민주통일국민회의 출범에 참여해 민생문제위원장을 역임했다. 활동의 비중은 민주통일국민회의에 있었다. 1984년 12월 민주언론협의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1985년 3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결성에 참여하여 정책기획실장을 맡았다. 1986년 전국에서 펼쳐진 개헌투쟁에 참여했는데, 특히 광주의 개헌투쟁에 깊이 관여되었다. 그리고 인천5·3민주항쟁 관련으로 수배되어 광주 등으로 도피했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았다. 1987년 4월 19일 제27주년 4·19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대표로 활동한 것을 이유로 구속되었고, 1987년 8월 5일 서울교도소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6월민주항쟁 덕분에 빨리 풀려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운동 국면에서는 민통련의 입장이었던 비판적 지지론을 취했다. 김대중과 특별한 인연은 없었으나, 한 잡지에 실린 김대중의 인터뷰에서 전봉준을 제일 존경한다고 한 것을 보고 지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국면은 민주화운동 진영 내 입장의 차이가 발생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1988년 평화민주당이 위기에 놓였을 때 재야인사들이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를 결성해 입당할 때 함께 했다. 1992년에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2008년 17대까지 연임했고, 2006년 제17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민통련 운동의 성격과 활동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