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유화국면 이전 민주화운동 주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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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김명인은 1958년 강원도 삼척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4세에 서울로 이사하였고, 부친의 광업이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1971년 휘경중학교, 1974년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서울대 인문계열에 입학하였고, 문학비평에 뜻이 있어 국문과를 택했다. 입학 후 인문대 역사철학회와 지양편집실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학년 때 인문대생을 선동하여 교련수업을 거부하는 시위를 주도한 적도 있었다.
유신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서울대생들은 76학번부터 각 단대 써클의 2학년 학생 중 핵심적 인물들을 모아 비밀학생운동 조직 ‘언더’를 운영하였고, 동기들 중 특히 적극적인 소수의 학생은 ‘언더 지도부’가 되어 다음 기수의 교육까지 맡았다. 김명인은 77학번 ‘언더’(77언더)의 멤버가 되었고, 조직 내 핵심적 사안을 논의하면서 ‘78언더’를 교육하는 ‘77언더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을 지도한 76학번의 대표적 인물은 이원주였다.
김명인 외 ‘77언더 지도부’에는 현무환과 최영선이 있었다. 이들은 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건설을 주도하였고, 5월 15일 서울역에 집결한 10만의 학생 시위대를 통솔하여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규모 인파의 시위를 접하자 이를 통제할만한 역량과 여건을 갖추지 못했던 언더 지도부는 총학생회장들의 해산(서울역 회군)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광주학살로 이어졌다.
80년 2학기가 개강하자 언더 지도부는 소모적 시위를 자제하고 81년 신군부와의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서울대의 침묵에 대해 즉각행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도 높았는데, 그 회답 차원에서 벌인 시위가 12월 11일 시위였다. 이날 시위의 성명서 ‘반파쇼학위투쟁선언’을 작성한 김명인은 학생운동 조직 내 소모적 논쟁들을 종식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학생운동의 방향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경찰 당국에 의해 서울대 운동권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조직사건으로 비화되었으니, 이른바 ‘무림사건’이다. 특히 김명인은 성명서 작성자이기에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으며, 취조 과정에서 만난 이근안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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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곤구술자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부모님 슬하에서 동구 수정동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내어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부산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당시 신설된 중앙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자유롭고 개척적인 분위기였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억압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동문 중심의 서클인 청맥의 멤버로 활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친구 주정민의 소개로 부산대 학생운동을 하던 언더서클 사랑공화국의 멤버가 되었고, 매주 진행되는 세미나와 끈끈한 인간 관계를 통해 의식이 고양되었다. 부마항쟁이 터졌을 때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졸업 이후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도 했다. 부림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된 후에는 불법적인 수사와 고문을 받았다. 1983년 출소 이후에도 노무현변호사 법률상담소에서 노동상담을 하거나, 부민협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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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영195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신철영은 천안고 재학 중에 도산연구반(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 정치의식을 성장시켰다.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해서도 아카데미 활동을 계속 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70년 11월 전태일분신사건을 접하면서 노동자들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군대 입대 직전인 1973년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 실태 조사에 나서서 노동의 현실을 목격했다.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한양주택에 입사하여 10달 정도 다니다가 영등포산업선교회 간사로 전직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노동조직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1970년대 말 이어진 노동관계사건에 적극 참여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이 도래하였지만, 노동계는 사북탄광, 원진레이온, 동국제강 등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면서 봄을 맞이하였다. 이태복과는 1979년 12월 경 만난 것으로 생각된다. 전민노련을 정식으로 결성하기 전, 이태복, 청계피복 양승조, 삼원산업 유동우, YH 박태연, 광주의 윤상원 등과 몇 차례 만나 8시간 노동, 노동자인권보장 등의 노동운동 강령 및 규약 논의하고 1980년 5월 3일 전민노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워낙 산업선교회 일이 바빠 주력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1년 6월, 조직이 드러나서 조직원들이 차례로 연행되었고, 신철영 또한 8월 3일 오전 9시 반쯤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 끝에 1심에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2심에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 3심에서 상고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석방 후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복귀하여 계속 노동운동을 했다. 1986년에는 이른바 전노추사건으로 수배를 받고 자수한 적이 있었다. 산업선교회 일도 그만두고 1990년에 들어서는 직접 정치에 나섰다. 1991년 민중당 노동위원회위원장, 1992년 총선에서는 부천지역에 직접 출마했다.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부천시장 보궐선거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005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사무처장으로 선임되어 위원장까지 하고 퇴임했다. 2019년 현재 경실련 공동대표,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위원 등을 하고 있다. 학림사건으로 고초를 겪었지만 평생 동지를 만날 수 있었기에 괜찮다며 소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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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호구술자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유치원을 다녔고 해방이 되자 가족과 함께 경남 합천으로 귀환한다. 부친이 일본서 모은 재산을 엔화로 가져 왔으나 금융조합에 예치한 엔화는 환전이 되지 않아 무일푼이 된 가족은 고향에서 근근히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큰 형은 일본으로 밀항하고 둘째 형은 큰 형을 만나러 일본으로 가던 중 행방불명이 된다. 구술자는 공부를 잘 해 부산의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지만 돈이 없어 대학진학을 못하고 한 해 뒤에 겨우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다. 졸업 후 취업할 때까지 가정교사로 일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대학 2학년 때 4월혁명이 일어나 경무대 앞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졸업 후 수년간 철학공부 등을 하다가 1968년 신진자동차에 입사한다. 구술자는 젊은 시절부터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데 박정권이 7·4남북공동성명으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한 후 유신체제를 선포하는 기만책 등에 분노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신향식, 이재문 선생과 만나다가 1977년 남민전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당시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1979년 남민전사건이 터지자 체포되어 취조과정에서 고문을 받았음을 진술하였다. 구술자는 구속되어 재판에서 5년형을 받아 수감 중 1983년 8월 특사로 출소하였다. 출소 후 구술자는 생활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4월혁명회, 남북민간교류협의회 등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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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근경남 창원 출신인 이선근은 경남고 재학 중에 도산연구반(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 정치 의식을 성장시켰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적이 있으며, 그때 이태복의 광민사에서 편집부장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 학교로 돌아와 시위를 조직하지만 좌절하였고, 결정적으로 5월 17일 서울역회군으로 당시 학생운동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후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을 도모하여 전국민주학생연맹, 이른바 전민학련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학림사건은 신군부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학생 및 노동자들을 반국가단체 조직범으로 몰아 처벌한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이다. 학림사건 관계자들은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 전민학련(전국민주학생연맹)을 각각 조직한 후 연대한다는, 이른바 노학 연대를 목적으로 하였다. 1981년 2월 27일에 결성된 전민학련은 1981년 봄부터 대학가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무림사건으로 학생운동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생각했던 전두환 정권은 연이은 학원가의 시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민학련 주도로 서울대에서 3월 19일 첫 시위가 발생한 이래 5월 중순까지 모두 8차례의 시위가 일어났다. 6월부터 경찰은 전민학련 관련자 400여 명과 전민노련 관련자 300여 명을 연행하였고, 19일에서 길게는 78일까지의 불법 구금과 혹독한 고문 끝에 25명을 구속하였다. 1984년 3.1절 특사로 석방된 이후 관념화된 학생운동의 실천 방안에 대해 고민을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1990년대 말부터 정당활동을 하면서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지금은 경제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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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구술자는 일제 말, 부친이 광부로 있던 강릉에서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후 부친의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이거하여 가난하게 살았다. 구술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웅변을 잘 했고 중학교 때부터 농촌4H활동을 통해 리더십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 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과 65년 연이어 한일회담반대투쟁을 하다가 수배되어 피신 중 검거되어 구류를 살고 군대에 강제징집되었다. 제대하여 복학하려니 복학이 거부되었다. 3선개헌을 추진하던 박 정권이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의 복학을 막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구술자는 독재와의 본격적 투쟁을 시작한다. 학원강사 등을 하면서 민수협, 민수청 등을 조직하여 민주화투쟁을 하게 되고 수차례 연행, 투옥되었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후에도 서울대시위배후조종혐의으로 구속되었다. 1976년 10월 민투를 조직(혹은 가입)하여 책임자가 되었고 활동 중 다른 사건으로 두 번 구속되었다.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5년형을 받아 복역 중 1983년 8월 특사로 출소하였다. 이후 민통련, 국본, 전민련 활동을 했다.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출소 후 민중당에 참여하여 선거에 출마했으나 참패를 겪었다. 이후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가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4월 총선에서 은평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3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민권익위원장과 특임장관을 역임했다. 구술자는 현재까지 자유한국당의 고문으로서 4대강 보 해체 반대투쟁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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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훈구술자는 기존의 언더서클과 별도로 친구, 후배들과 함께 세미나팀을 구성해서 공부를 하였다. 세미나 도서와 자료는 삼촌 또는 지인을 통해 입수를 하고, 자료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그러나 부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출소 후에는 고향인 거제도로 내려가 약국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를 지원하거나, 지역신문을 만들거나,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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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구술자는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나와 1971년 서울대에 입학을 했다. 구술자는 친구의 전도로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에 출석하면서 사회에 대한 의식에 눈을 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속한 서울공대 내 학생운동도 열심히 참여했다. ‘산업사회연구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며, 1973년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군 제대 이후 아는 선배의 권유로 부산에 내려오게 되었다. 부산지역에서 김형기 전도사와 함께 부산중부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구술자는 복학 후 서울에서 기독청년회 회장으로, 부산과 서울지역 양서협동조합 설립과 운동을 통해 합법적인 영역에서 사회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러한 전력이 문제가 되어 구술자는 부림사건의 피의자로 사건에 연루가 되었다. 그러나 구술자의 증언처럼, 그는 부산 지역의 언더서클 활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의 구속과 재판, 그리고 교도소 복역은 공안당국의 치밀한 조작사건을 반증하는 것이다. 출옥 이후에도 구술자는 부산지역의 사회운동을 후원하며 지원하는 역할을 기꺼이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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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평숙구술자는 1938년 전남 고흥에서 비교적 유족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기운이 세어 씨름대회에서 어른들을 이겼다고 한다. 고흥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고향 선배인 신향식과 친하게 지냈고 이후 평생에 걸쳐 막역한 관계를 유지한다. 구술자는 광주의 조선대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완력이 세어 싸움에 휘말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학교도 자퇴했다. 이후 군대에 입대하여 병사들의 식량을 부정하게 유출하는 상관들에 맞서기도 하고 부하들을 괴롭히는 타 부대원과 싸우기도 했다. 제대 후에는 지인의 주선으로 조선대학교 경제학과에 편입했으나 중도에 그만 두었다. 이후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소일하다가 1971년경 서울에서 장안기원을 경영하고 기원을 폐업한 후 박정규 철학연구소에서 역술을 공부하여 역술가로서 1973년 최봉조 철학원을 경영하였다. 1977년 3월 고향 선배 신향식의 추천으로 남민전에 가입하였다. 반정부 삐라 살포에 참여하였고 1978년에는 무력부에 소속되었으나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 1979년 10월 남민전사건이 터지자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폭행,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아 갈비뼈가 상하기도 했다. 이후 징역형을 받아 광주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83년 8월에 특사로 출소하였다. 이후 서울 동대문 근처에서 역술원을 차렸는데 시국사범 출신자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사무실을 이용하는 통에 경찰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고 형사들도 이사를 종용하여 결국 거주지를 부산으로 옮겨 현재까지 부산에서 역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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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환
현무환은 1958년 대구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가난 등 베이비붐 세대로서의 평범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민주화운동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진보적 영향이나, 학창시절 선생님으로부터의 영향,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예민한 심성 등을 구술자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평범했다고 하고, 대학 진학 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매진하여 이미 대학입학 전 높은 수준의 사회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이 신기했다고 말한다. 구술자의 사회의식은 서울대학에 입학하여 형성되었으며, 그 계기는 학회와 MT, 교회와 선배들의 재판 방청 등이었다.
유신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서울대생들은 76학번부터 각 단대 써클의 2학년 학생 중 핵심적 인물들을 모아 비밀학생운동 조직 ‘언더’를 운영하였고, 동기들 중 특히 적극적인 소수의 학생은 ‘언더 지도부’가 되어 다음 기수의 교육까지 맡았다. 현무환은 77학번 ‘언더’(77언더)의 멤버가 되었고, 조직 내 핵심적 사안을 논의하면서 ‘78언더’를 교육하는 ‘77언더 지도부’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을 지도한 76학번의 대표적 인물은 이원주였다.
현무환 외 ‘77언더 지도부’에는 김명인과 최영선이 있었다. 이들은 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건설을 주도하였고, 5월 15일 서울역에 집결한 10만의 학생 시위대를 통솔하여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규모 인파의 시위를 접하자 이를 통제할만한 역량과 여건을 갖추지 못했던 언더 지도부는 총학생회장들의 해산(서울역 회군)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광주학살로 이어졌다.
80년 2학기가 개강하자 언더 지도부는 소모적 시위를 자제하고 81년 신군부와의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서울대의 침묵에 대해 즉각행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도 높았는데, 그 회답 차원에서 벌인 시위가 12월 11일 시위였다. 경찰은 이날 살포된 성명서 ‘반파쇼학위투쟁선언’의 작성자 김명인을 중심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하였으나, 시위를 이끈 77언더의 핵심은 76학번 이원조를 포함한 4인방 중 현무환이었다. 따라서 김명인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재판기록은 완전히 사실과 다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