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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조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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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조성우
면담자
신동호
구술일자
2018. 7. 15, 7. 22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회의실
구술시간
331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YWCA위장결혼식사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89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1990년 범민련 남북해외실무회담 대표

1996년 전국연합 조국통일위원장

1998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의장

2013년 민화협 상임의장

2018년 현재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

주권자전국회의 상임공동대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민화협 지도위원

구술내용 요약

고려대 행정학과 입학하고 곧바로 해병대에 지원하였다. 거기서 만난 함호철의 소개로 복학해서 청년문제연구회(청연)에 가입,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순수 봉사 서클이던 청연을 뒷날 강력한 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서클연합회를 조직, 고려대 학생운동의 기틀을 닦았다. 1975년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재판 거부와 항소 포기로 중형이 확정돼 3년 복역하고 나왔다. 그 뒤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회장을 맡았다가 표면상 2선으로 물러나 1980년 봄 전민항쟁을 일으킬 전국 조직을 구성하던 중 10.26사태를 맞았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야당과 재야 내부에도 많은 혼선이 있었다. 민청협은 독재자 국장은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NCC를 필두로 한 재야 일각에서는 향후 민주화 일정에 대한 낙관론에 경도되어 있었다. 미 대사관 측의 ‘움직이지 마라, 잘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민주화진영 내부를 상당히 교란시켰다고 본다. 특히 김대중·김영삼 양김씨는 오히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체제를 강화시켜 직선제 개헌을 주도하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군부가 나올 것으로 우려하면서 통대선거저지 국민대회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혼란과 혼선 때문에 박정희 사후 YWCA위장결혼식 집회가 열리기까지 한 달이나 걸린 것이다. YWCA위장결혼식 집회는 현장 팀과 1980년 준비 팀으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1980년 준비 팀은 집회 후 검거되지 않았고, 수배된 가운데서도 각 대학 복학생조직과 연계해 대학가의 정치투쟁을 이끌고자 하였다.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은 잘못된 결정이었고, 민청협 논의 사항이 현장 지도부에 잘 전달되지 못하였다. 결국 나를 비롯한 민청협 활동가들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올가미가 씌어져 고초를 겪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10.26 한 달 뒤에야 YWCA집회가 이루어진 까닭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