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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열
사업개요
- YWCA위장결혼식사건
- 18년 5개월 10일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던 중,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격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때까지의 과도기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차 연도에서는 이 시기의 주요 사건인 ⑴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11.24.), ⑵서울역 회군(1980.05.15.)까지의 학생운동, ⑶사북항쟁(1980.04.21.~24.)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을 수행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최열
- 면담자
- 신동호
- 구술일자
- 2018. 6. 22
- 구술장소
- 환경재단 대회의실
- 구술시간
- 105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YWCA위장결혼식사건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75.6. 명동성당사건으로 4년 옥고(긴급조치9호)
1979.6. 민주청년협의회 부회장
1979.12. YWCA위장결혼식사건으로 1년 4개월 옥고(포고령위반)
1982.5.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설립
1988.9. 공해추방운동연합 창립, 공동의장
1992.6. 브라질 리우환경회의 한국민간대표단 단장
1993.4. 환경운동연합 창립, 사무총장
2000 2000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2002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2002 환경재단 대표, 이사장(현)
- 구술내용 요약
-
1969년 3선개헌반대운동에 참여하고, 1971년 교련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75년에는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다. 재판 거부로 인해 징역 6년을 받고 4년 복역했다. 그때 환경운동으로 진로를 잡고 대구교도소 이감 후 본격적인 환경 공부를 했다. 1979년 5월 출소했을 때 민주화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해서 환경운동은 미뤄두고 민주청년협의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러던 중 10.26사태가 터져 YWCA위장결혼식 집회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당시 정세가 혼미해 잘못하다가는 권력을 쥔 세력의 양동작전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볼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진영이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입장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관철되었다.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정상적인 집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위장하게 되었다. 참여 범위를 넓히기 위해 EYC를 끌어들이고 재야세력과 폭넓게 접촉했다. 대회 당일 축의금을 받다가 연행되었다.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 끌려가 엄청나게 맞은 뒤 조사를 받았다. 12.12사태 후에는 조사와 재판이 빠르게 진행됐다. 교도소에서도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계엄확대 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이부영 선배 같은 이는 교도소 내 삼청교육까지 받는 고초를 당했다. 19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돼 나오는 백기완 선생이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처럼 돼 있었다. 백 선생을 모시고 1년 동안 요양을 한 결과 건강이 호전되었다. 다음해 YWCA에서 진짜 결혼식을 올리고 백 선생이 주례를 섰다. YWCA위장결혼식사건을 무료변론해주었던 인연으로 이세중 변호사께서 환경운동연합 초대 공동대표, 환경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주셨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YWCA위장결혼식 집회를 하게 된 배경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