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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오
사업개요
- 사북노동항쟁
- 18년 5개월 10일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던 중,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피격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후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때까지의 과도기를 흔히 ‘서울의 봄’이라 일컫는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1차 연도에서는 이 시기의 주요 사건인 ⑴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11.24.), ⑵서울역 회군(1980.05.15.)까지의 학생운동, ⑶사북항쟁(1980.04.21.~24.)을 대상으로 구술 채록을 수행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황인오
- 면담자
- 송철원
- 구술일자
- 2018. 5. 24
- 구술장소
- 현대사기록연구원
- 구술시간
- 152분
구술컬렉션 > 노동운동 > 사북노동항쟁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71~72 서울 성북동 가내공업 종업원 종사
1972~76 사북 동원탄좌 갱외부, 갱내부 종사
1979~82 동원탄좌 재입사, 사북항쟁 참가, 수배, 미스유니버스사건 등 복역
1983~89 성남 등지에서 노점상, 사북 귀향 노동상담소 운영, 대파업으로 구속 석방
1990~98 서울에서 건축노동 종사, 밀입북(90) 중부지역당사건(92)으로 무기 징역 선고 석방(98)
2001~2004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2007~2011 부천시민단체 대표 등 경기지역 시민운동 단체 종사
2011~현재 혁신과 통합 참여를 계기로 정당 활동 참여
- 구술내용 요약
-
경북 문경 출생으로 종조부가 광부였고, 부친도 광부로 작업반장을 지냈다. 동생 황인혁과 황인욱도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1968년 9월 사북으로 이주, 1971년 가정 사정으로 사북중학교 2년을 중퇴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하고자 상경, 공장 직공 등으로 취업하여 책도 읽을 수 있었으나 공장이 문 닫을 지경에 이르러, 신문이라도 읽으려면 탄광이 낫겠다 싶어 17세이던 1972년 9월 사북으로 돌아와 광부 생활을 했다. 1974년 울산, 서울, 인천을 떠돌다 그해 겨울 다시 사북으로 돌아와 광부생활을 하며 《동아일보》, 《신동아》, 《고시계》 등을 구독했고 1979년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그 사이 광산 탈출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던 중 《기독교사상》 등 서적을 접하며 의식 변화를 겪으며 1980년 1월경 사북탄광에 복귀했다. 사북항쟁 당시에는 이들을 잘 알지 못했지만, 중심인물이었던 이원갑은 장수, 신경은 책사에 비유할 수 있다. 항쟁이 터진 4월 21일 오후 도시산업선교회에 연락했고 다음날 천영초, 정문화, 이소선 등이 내려와 사태파악을 하는 데 협조했다. 후일 공수부대 중사였던 당숙인 황영연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진압하기 위해 영월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5월 8일 검거를 피해 상경하여 통일사회당 사람들과 교우하던 중, 광주학살의 비극과 신군부의 헌정파괴를 전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에서 CBS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될 미스유니버스 대회장을 장악할 목적으로 폭약(다이너마이트)을 구하러 6월 26일 사북으로 갔다가 밀고로 체포되어, 이근안 등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한 후 1982년 12월 24일 석방됐다. 석방된 후 노점상으로 돈을 모아 1984년 말 사북으로 내려가 활동하다 1987년 9월 파업 배후조종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한 후 결혼했다. 1990년 10월 북한의 실체를 보고자 월북하여 1992년 조선로동당중부지역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8년 석방됐다. 이후 부천에 정착하여 2004년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 정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사북노동항쟁을 알리기 위해 감행한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장 폭파 미수사건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