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박현용

  • 공유하기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박현용
면담자
이광욱, 김선미
구술일자
2010년 8월 17일
구술장소
부산 민주공원
구술시간
3시간 19분 20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부산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1년 출생 1960년 부산고 2학년 음악부장으로 3‧24 시위, 원정시위 참여
구술내용 요약
구술자 박현용은 일본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모는 해방이 되자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박현용은 초등학교부터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가족의 경제적인 부양은 이미 장성한 형들과 누나의 몫이었다. 그는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시에 평균적인 생활을  했다고 기억했다. 
구술자가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정국은 무척 혼란했다. 마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해 마산사건의 책임과 경위를 묻는 여야의 싸움이 시끄러웠으며, 이어 3월 15일에는 정‧부통령 선거가 열렸지만 여당의 지나친  관권 선거와 부정이 극심해 야당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기성세대의 무기력함과 도덕적 혼란에  대해 학생들은 분노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 
구술자는 어린 시절부터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를 따르고 존경했다. 신익희를 좋아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지만 여하튼 신익희를  존경했다. 존경하는 분이 민주당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기에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의 정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승을 비롯한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하게 된 동기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경찰과 학교  교사의 감시망을 피해 학교 밖에서는 신성범의 집에서 자주 모였으며, 학교 안에서는 강당에 있는 음악실을 통해 학생들과 접촉했다.  견제와 감시가 엄했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졌으며, 점조직과 같이 개별적인 접선을 통해 시위를 준비하였다.  
구술자는 학교에서 음악부장을 맡고 있었다. 음악부의 경우 음악대회에 나간다든지 노래 연습을 다른 학교 음악부와 함께 할 기회가  많았다. 자연히 외부 학교의 학생들과도 만날 수 있는 일이 많았기에 사전 모의 과정에서 경남고, 남성여고, 경남여고에 연락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음악실의 열쇠를 음악부장인 구술자가 관리했기 때문에 시위 때 쓰려고 준비한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비밀리에  음악실 안에 보관할 수 있어 시위 준비에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 
처음부터 학생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이 마음이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위를 의논하던 학생들 가운데는 부모가 공무원이나 경찰  등에 있었기 때문에 시위 참여 자체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 소극적인 입장의 학생들은 시위 준비에서  빠지는 대신 그러한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제외된 학생들에게는 시위와 관련해 어떠한 이야기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부산고 학생들이 시위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을 혼자 독자적으로 진행해가기 보다는 주변의 학교와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형태의 시위를 계획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한계에 부딪히고 상황이 변해 결과적으로는 3월 24일의 시위는  부산고가 주도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초량교회의 등사기를 빌려 호소문과  결의문 등을 밤새 작성하며 치밀하게 시위를 준비했다. 
3월 24일 아침, 학생들은 교무회의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동원해 나가려 했으나 마침 그날 교무회의가 없어지면서 첫 단추부터 쉽지  않은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고 눈치를 보면서 교실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승  등 시위주도 학생들은 교실 문을 열며 동기들과 후배들을 선동해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교문을 막으러 나온 선생들과 학생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며 시위는 실패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담장을  뛰어 넘고, 밖에서 다시 돌아와 교문을 여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대다수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거리에 나가자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대의 행렬이 부산역 가까이 이르자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과 부딪히며  부상자와 검거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고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힘껏 외쳤고 거리에 있던  시민들은 학생들을 돕고 격려하는 등 뜨거운 호응을 보내기도 했다. 
부산고의 시위 과정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침 마산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국회조사단의 행렬이  부산진을 지나다가 시위대와 만나게 된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로 착각하고 돌을 던지는 등 조사단을 공격하는 등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산고 학생들의 시위는 지역을 넘어 중앙에까지 화제가 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은 부산고 시위에 가담한 1학년 학생들의 경우 미리 공유하는 부분이 없었지만 2학년 선배들이 나가자고  말을 하고 교실의 문을 열었을 때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빠져나가 학교 밖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부산고의 시위를  주도했던 구술자 박현용, 김승과 같은 학생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당시 선배들의 말을 믿고 따라준  후배들과 동기들 모두가 주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부분을 볼 때 당시 여당인 자유당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특별한 일부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굉장히 광범위하게 많은 학생들이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참고자료

《국제신문》
《부산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부산고등학교, 1960, 『청조』제10호, 부산고등학교
박현용의 개인 일기
부산고등학교, 2005, 『부산고등학교1960년사』, 부산중‧고등학교총동창회 재경부산중‧고등학교동창회
학민사 편집실 편, 1983, 『4‧19의 민중사』, 학민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부산민주운동사』, 부산시사편찬위원회
박철규, 2000, 「4월민중항쟁의 전개과정-부산」, 최장집 외, 『한국민주주의의 회고와 전망』, 한가람
김선미, 2010, 「부산지역 4‧19민주항쟁의 주도세력」, 『지방사와 지방문화』13-1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