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구술컬렉션
1970년대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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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석
성장과정과 아버지, 교우관계, 양서협동조합과 도깨비집, 78년 7월 반유신페인팅 사건, 학내 운동권의 분위기, 10월 16일 부마항쟁 발발, 상황, 부마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분위기, 부림사건, 고문과 투옥생활, 기독교인권위원회, 기독교청년연합회,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한국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회, 6월항쟁과 국민운동본부, 전교조 활동
하이라이트 내용: 1979년 부마항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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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식
김균식은 1958년 1월 대구시 남산동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가족 중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여럿이었다. 1977년 계명대에 입학해서 경북대 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되고 계명대에 새로 입학한 박명규를 만난다. 계명대는 1975년 홍정회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1970년대 중반에 두드러진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계명대 민주화운동은 고등학교 인맥 중심으로 연결되는 현상을 보였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의 여파도 상당했다. KSCF는 학생운동 조직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지지하고 후원하는 관계였다. 계명대 민주화운동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은 1978년 11월 결성된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이었다. 이를 매개로 대구․경북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연결되었고, 서울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1979년 9월 4일 대구의 3개 대학(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연합시위가 준비되었으나, 계명대만 성사되었다. 이 일로 수배 상태에 놓여 부산, 울산, 원주 등으로 도피하다가 민주화의 봄 국면을 맞았다. 남민전과는 관련이 없었다. 계명대에 복학하고 학원민주화운동 등에 참여했다. 특히 5월 14일 가두시위가 크게 전개되었고 대거 검거되었다. 김균식도 당일 연행되어 남부경찰서를 걸쳐 50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소요죄가 적용되어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1982년 8월 15일 석방되었다. 1983년부터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준비하다가 1984년 임진호의 권유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낙향했다. 1985년 결성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사회부장으로 참여했다. 이후 1980년대 대구지역 민주화운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역할을 했다.
- 출생과 가정환경, 민주화운동 참여와 가족사
- 대구‧경북 민주화운동 정리의 미흡과 계명대 상황, 1977년 계명대 입학, 박명규를 비롯 여러 인물을 만남
- 1970년대 중반, 계명대 학생운동, 1970년대 계명대 학생운동의 주요 인물과 인맥
- 1978년 9월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창립에 참여
- 1970년대 후반기 대구‧경북 대학들의 연계, 1970년대 후반기 계명대 학생운동
- 1979년 대구‧경북 학생운동, 1979년대 9월 4일 계명대에서만 시위 성공
- 1979년 말부터 1980년 2월까지 도피 생활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에 참여, 울산‧원주 등으로 도피
-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 계명대 상황
- 1979년 9월 4일 시위의 피해, 1980년 5월 계명대의 민주화운동
- 1980년 5월 대구‧경북 각 대학의 피해, 1980년 5월 계명대의 시위
- 1980년 5월 50사단으로 연행, 1980년 5월 14일 계명대의 시위와 참여자 연행, 조사
- 1983년부터 노동운동을 준비
- 1985년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결성에 참여
- 1986년 4월 5일 신민당 대구 개헌 현판식
- 1987년 대구 6월항쟁, 1980년대 후반 이후 대구에서의 민주화운동
- 1970년대 후반기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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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어린시절 성장과정, 대학교 써클(후사연) 활동, 교련철폐운동, 민주수호운동 활동, 87년 민주화 시국 선언, 민교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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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균하이라이트 내용_조선일보가 사상계를 인수하려다 실패한 이야기
구술내용_
김승균은 4.19혁명에서부터 남북교류운동에 이르기까지 반독재투쟁과 통일운동에 진력한 대표적 인물이다. 《사상계》 책임편집인 시절 5.16쿠데타 9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고발하고자, 당시 동빙고동 ‘도둑촌’이라 불리던 곳을 소재로 한 《사상계》 5월호의 권두시를 쓰도록 김지하에게 청탁한 것이 담시 ‘오적(五賊)’이 탄생하게 된 경위였다.
구술자는 ‘오적(五賊)’이 실린 《사상계》가 3일 만에 매진되고, 야당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려 20만 부기 발간되어 큰 파문이 일자 박정희 정권이 탄압하고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을 소상히 진술하였다. 또한 《사상계》가 폐간되기 전 《조선일보》가 인수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또한 《민주전선》에 실린 ‘오적(五賊)’에서는 박정희와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군 ‘장성’을 뺀 ‘4적(四賊)’이었다는 것과 김지하의 처음 원고에는 ‘오적(五賊)’을 고발한 ‘꾀수’가 잡혀가는 것으로 끝났는데, 구술자가 지적하여 ‘오적(五賊)’이 벼락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나게 했다는 대목은 이번 구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구술자는 ‘오적(五賊)’사건 이외에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민주수호청년협의회의 창설 등 민주화 투쟁에 관한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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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구술자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부산대학교 학생운동, 부마항쟁, 5·18항쟁, 6월항쟁 등과 재야활동 및 정당활동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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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욱
출생과 가족관계, 학창시절, 양서협동조합, 부림사건, 영락교회사건, YMCA활동,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조직, 저서와 출판, 민주화운동에 대한 감회
하이라이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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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열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부산대학교 학생운동, 부마항쟁, 5·18항쟁, 6월항쟁, 7,8월 노동자대투쟁 등과 이후 노동운동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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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영주
목영주는 1947년 1월 경기도 용인군에서 출생했다. 대한중석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1958년에 사망했다. 1962년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봄 상경하여 종로 2가 관철동의 제일제약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얼마 후 친구 소개로 견지동 30번지의 휘문출판사로 이직했다. 출판사의 특성상 지성인들과 안면을 갖게 되었고, 함석헌, 이희승 등의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씨알의 소리≫, ≪대화≫, ≪현존≫을 읽으면서 사회의식을 형성했다. 1969년경 강원도 춘천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1970년에 춘천지사장으로, 1971년 강릉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0년대 강원도 춘천과 강릉은 민주화운동의 기반과 활동은 희미했다. 특히 강릉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강원대의 영향은 춘천 중심으로 미쳤다고 봐도 그르지 않다. 강릉은 천주교와 천주교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이 힘겹게 전개되었다. 목영주는 춘천에서는 죽림동성당을, 강릉에서는 임당동성당을 매개로 활동했다. 목영주가 몸담았던 주요 단체는 명경회, 강릉신협 등이었다. 강릉의 천주교는 원주교구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래서 목영주의 활동은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등의 지향과 유사했다. 1979년 6월 29일 감시를 받고 있던 함석헌 댁을 방문한 바 있고, 1980년 3월 1일 함석헌을 강릉으로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1980년 초반에는 하슬라학당을 설립 운영했으며, 1986년에는 ≪새벽들≫을 발간했다.
- 용인에서 출생, 가족사, 고향과 가족에 대한 회고
- 한국전쟁기의 고충, 중학교 졸업, 한국전쟁기 피난
- 아버지의 대한중석 취업, 중학교 졸업 후 상경
- 제일제약주식회사 취업
- 친구 소개로 휘문출판사 입사
- 함석헌,이희승 강연을 듣고 영향을 받음
- 전남, 강원도와의 인연
- 천주교 입문, 명경회
- 강릉신협 참여, 강릉신협 이사로 합류, 활동 사항
- 원주와 강릉의 천주교와 사제, 신자의 활동, 강릉의 재야인사, 종교계 인사
- 유신 후반기 강릉의 상황, 김지하와의 만남
- 강원도의 민청학련, 1970년대 후반 강릉의 정서
- 강릉에서의 가톨릭농민회
- 1979년 6월 29일 함석헌 자택 방문, 함석헌의 강릉 강연
- 1980년대 강릉의 상황, 민주화의 봄 국면 강릉, 강릉의 6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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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규
박명규는 1952년 3월 경북 청송군에서 출생하고,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또래들보다 늦게 1973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입학했다. 정치외교학과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과였다. 강기룡의 소개로 한국풍토연구회에 가입했다. 한국풍토연구회는 경북대 학생운동의 중심 맥을 잇는 동아리로 1971년 11월 결성되었고 1972년부터 신입생을 회원으로 받았다. 박명규는 1973년에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선배들의 일을 도왔다. 1974년이 되자, 선배들은 뭔가 일이 발생할 것 같다며, 군대로 몸을 피하라고 했다. 군 복무를 하던 중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다. 1975년에 복학해서 민주화운동을 재개하던 중, 4월 9일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다음 날 경북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박명규는 이 일로 인해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경북대는 제적 처분을 내렸다. 1977년 3월 계명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계명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1978년 9월 대구양서이용협동합을 창립했는데, 비용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은 부산의 최준영과 연계해 추진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메아리야학 설립과 운영을 지원했다. 계명대에서는 KSCF의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박명규도 KSCF 회원이었다. 1979년 10월 25일 계명대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발생했다. 박명규는 11월 5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연행 및 구속되었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며, 12월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80년 3월 14일 복교하여 ‘학생회조직준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5월 중순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계엄사를 걸쳐 50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1980년 9월경에 석방되었다. 이후 민통련 등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80년대 중반에 청송으로 귀향하여 과수원 농사를 지었다. 청송에서도 농민운동을 비롯해 이런저런 일에 도움을 주었다.
- 출생과 가정 환경, 영향을 준 인물
- 대구농림고등학교, 고등학교 졸업 후 농사를 짓다가, 1973년 경북대학교 입학
- 1973년 경북대 민주화운동의 지형, 1974년, 군 복무하는 동안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경북대 학생운동 충격
- 한국풍토연구회(한풍회)와 1970년대 경북대 민주화운동의 주요 인물
- 1973년 12월 2일, 경북대 시위, 1970년대 경북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
- 1974년 군 복무를 하게 된 경위, 1975년 4월 10일 시위로 구속, 1977년 계명대 입학
-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설립과 한양서점 인수, 메아리야학 설립 및 운영 지원
- 1977년에서 1979년까지 계명대의 상황과 민주화운동
-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설립과 운영에 관한 숨겨진 얘기
- 1970년대 후반기, 대구‧경북의 학생운동 상황
- 1970년대 후반기 기독교 학생운동,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의 운영과 해산
- 가족의 희생과 지원, 1980년대 전반기 대구의 민주화운동
- 1979년 9월 4일, 대구‧경북 대학생 연합시위, 1979년 10월 25일, 계명대 유신 반대 시위, 1979년 11월 5일, 대공분실 연행
-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 계명대, 5‧18민주화운동 국면의 대구
- 1980년대 전반기의 상황, 1980년 군사 재판, 1980년대 후반기의 활동
- 결혼식에 담긴 사연, 1980년대 민주화운동 후원,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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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
박종훈은 1956년 2월 전북 완주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일본 탄광에서 일하다 탈출했고, 광복된 후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습득한 냉동기 기술로 경제적 기반을 잡았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전주로 전학하여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1972년 전주고 학생들의 항거가 있었는데,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1974년 전북대 원예학과에 입학했다. 전북대는 민청학련과 거의 관련이 없었다. 전북대에 입학해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박종훈은 전주고 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과 교류했으며, 많은 정보를 전달받았다. 1975년 휴학하여 서울 등지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과 교류하다가 1976년 복학했다. 그해에 전북 KSCF와 연결이 되었다. 1977년 4월 이른바 전북대 유인물 배포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받았다. 이 일을 둘러싸고 견해 차이가 있었고, 피해 범위를 예상하지 못한 채 결행되었다. 어쨌든 이 일로 4명이 구속되어 충격이 상당했다. 조직을 충분히 정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78년 3월 학적 변동으로 인해 강제징집 형식으로 입영했다. 여러 경로를 거쳐 하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나왔다가 8월 16일 기장청년회 전국청년교육대회에 참가했다. 이 일이 드러나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1979년 12월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민주화의 봄 국면 전북대 학원자율화운동에 참여했다. 예비검속은 모면했고, 도피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35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어 조사받았고, 광주 상무대로 이송되어 군사재판에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3월 1일 석방된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 1986년 5월 전주 개헌현판식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1987년 석방되었다.
- 삼례에서 출생, 부모님이 상업에 종사하여 경제적으로 윤택
- 일제강점기 일본 삿포로 미쓰비시 탄광에서 일한 아버지, 겨울에 탈출, 아버지는 광복되고 1년 후 삼례로 돌아와 냉동기 사업
- 삼례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전주로 전학하여 학업
-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전북의 1970년대 민주화운동
- 1974년 전북대 원예학과 입학, 1970년대 전반기 전주고 학생들의 항거
- 전북민주화운동의 주요 네트워크, 금강문고, 전북대는 민청학련과 거의 무관
- 1970년대 중반 전북대 민주화운동
- 사회과학 공부와 민주화운동의 인맥, 공부한 사회과학 서적과 영향
- 휴학했다가 1976년에 복학하여 KSCF 그룹과 연계
- 1977년 4월 전북대 유인물 배포사건, 1977년 4월 전북대 유인물 배포 사건을 둘러싼 견해차, 1977년 4월 전북대 유인물 배포 사건의 파장
- 전북대 학생운동 그룹 형성과 활동
- 1978년 학적 변동으로 강제 입영, 1978년 8월 기독교청년회 전국청년교육대회 기간에 첫 휴가
- 1976년 8월 목포에서 개최된 기독교청년회 전국청년교육대회 참석, 1978년 8월 기독교청년회 전국청년교육대회에서 거리 시위 성사
- 1978년 8월 기독교청년회 전국청년교육대회 거리 시위 관련 연행, 하루 만에 1심을 마치고
- 육군교도소, 안양교도소에서 옥살이, 교도소 인권 투쟁, 1979년 12월 5일 석방, 옥살이하던 시기의 전북대 학생운동
-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 전북대 상황, 1980년 5월 전북대 이세종 사망
- 전북대 농성 학생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35사단 헌병대 영창에 수감
- 1980년 5월 17일 자정, 계엄군의 전북대 진입 전후 상황, 1980년 5월 이후의 도피 생활
- 전북대 의대 학생들의 시위, 광주로 이송, 상무대 영창 수감, 1981년 3월 1일 특사로 석방
- 1986년 5월 전주 개헌현판식 사건, 1987년에 석방, 1981년 3월 석방 이후의 활동
- 1970년대 후반 전북지역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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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관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동아대학교 학생운동, 부마항쟁, 학원민주화투쟁, 6월항쟁, 7,8월 노동자대투쟁 등과 이후 노동운동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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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철
성락철은 1953년 10월(음력) 강원도 원주시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은 한국전쟁기 월남민이었다. 아버지는 진보당에 참여했고, 장일순, 윤길중 등과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 영향을 받았다. 원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돕다가 1974년 춘천의 강원대 농화학과에 진학했다. 강원대에서는 거멀못과 인연을 맺는다. 거멀못은 춘천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청년들의 모임으로, 이들은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들로 성장하고 활약한다. 성락철은 거멀못의 운영 방식과 특성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거멀못은 1977년 강원대에 언어문화연구회를 동아리로 등록하여 공개 활동을 하는데, 성락철은 1979년에 회장이었다. 늦은 나이로 대학에 입학한 관계로 1975년부터 1976년 원주에서 군 복무를 하고, 1977년에 복학했다. 복학한 후에는 학교 인근에서 ‘큰 걸음 서점’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고, 천주교 춘천교구 교육원 야학운동에 참여했다. 1979년 9월 3일 강원대에서 발생한 시위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12월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부터 천주교회 신자가 되었다. 1980년 3월 10일 강원대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5월 18일 예비검속되어 보안대로 연행되었다. 제2군단 헌병대 영창에 감금되어 재판받았고, 10월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원주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에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참여했다.
- 원주의 지역적 특성과 가족사, 한국전쟁기 함경도에서 월남한 부모님
- 진보당, 장일순, 원주의 천주교
- 가족의 생활과 경제, 경제적으로 힘겨운 상태에서 학업
- 가족이 두부로 생계를 잇게 된 경위, 또래에 비해 진학이 늦어진 이유
- 1974년 강원대 농화학과 진학, 민청학련과 최열, 민주화운동에 관심
- 거멀못과 인연, 거멀못의 공부
- 1975∼1976년 원주에서 군 복무, 1977년 강원대 복학
- 1970년대 후반기 원주에 머물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
- 1977년 거멀못의 강원대 공개 동아리 언어문화연구회
- 1977년 큰 걸음 서점, 1970년대 후반기 강원도의 상황과 민주화운동
-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 구속
- 1979년 9월 3일 강원대 시위,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의 강원대, 1980년 3월 강원대 복학
-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지학순 주교가 설립한 원주 진광고의 특성
- 강원도의 공안 기구, 1980년 5월 예비검속으로 연행, 조사
- 1980년 5월 예비검속으로 연행되어 조사와 재판, 1980년 10월 석방과 이후의 활동
- 1980년대 중반 이후 강원도 민주화운동
- 1970년대 후반 강원도 민주화운동이 삶에 미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