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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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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현
강익현은 1957년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난산교회 강희남 목사이며, 큰형은 강세현으로 전북지역 민주화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강희남 목사는 1970년대 중반부터 반유신운동, 민주화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강세현은 1978년 8월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대회와 1980년 5‧17비상계엄으로 구속되었고,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전북본부 집행위원을 지냈다. 강익현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와 두 사람의 활동을 확인해 주었다.
강익현은 1977년 원광대학교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생활하다가, 1학년 말경 고등학교 동문인 최갑선, 강영록이 권유해서 KSCF에 가입한다. KSCF에서 강연과 토론을 들으면서 사회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고 학생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강익현은 1978년부터 원광대학교 KSCF 조직 결성을 담당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78년 8월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대회와 1979년경 4‧19혁명 기념 KSCF 연합수련회에 참여했다가 각각 연행되었고 훈방 처분을 받았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인 2월에 원광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직을 맡았고, 총학생회 자치 조직 건설을 위해 힘썼다. 한편 1980년 3월 7일 한의대생들이 한의과대학의 내부 문제 및 학원민주화를 위한 농성을 시작하는데, 이들은 강익현 그룹과 달리 학내 문제의 우선 해결을 목표로 한 그룹이었다. 1980년 5월 9일 원광대학교 총학생회가 출범했으나, 다음 날 총학생회 임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강익현 등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목표를 달리하던 2개 그룹이 연대하여 활동에 들어간다. 원광대학교 학생들은 5월 8일부터 16일까지 매일 시내로 진출하면서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강익현은 위험하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학생들을 해산시킨 뒤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6월경 전북합동수사본부에 의해 부산에서 체포돼 연행되었다. 익산경찰서와 510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고 35사단에 구금되었다가 광주시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되었다. 군사법정에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8월 25일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는 전라남북도 KSCF 지하 조직 재건 임무를 맡았는데, 홀로 전라남북도 조직을 재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83년 유화국면에 복학 조치가 내려졌지만, 강익현은 1985년에 복학한다. 그리고 1985년 4월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그런데 운동권과 비운동권 간의 갈등, 학생회비 지출 문제로 총학생회 운영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85년 8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집안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서 학생회장직을 사퇴하고, 민주화운동과 거리를 둔다. 1988년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한의원을 개원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한의원을 개원한 이후에는 음으로 양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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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석성장과정과 아버지, 교우관계, 양서협동조합과 도깨비집, 78년 7월 반유신페인팅 사건, 학내 운동권의 분위기, 10월 16일 부마항쟁 발발, 상황, 부마항쟁 이후 학생운동의 분위기, 부림사건, 고문과 투옥생활, 기독교인권위원회, 기독교청년연합회,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한국공해문제연구소 부산지회, 6월항쟁과 국민운동본부, 전교조 활동
하이라이트 내용: 1979년 부마항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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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식
김균식은 1958년 대구시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가족 중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여럿이었다. 1977년 계명대에 입학해서 경북대 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되고 계명대에 새로 입학한 박명규를 만난다. 계명대는 1975년 홍정회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1970년대 중반에 두드러진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계명대 민주화운동은 고등학교 인맥 중심으로 연결되는 현상을 보였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의 여파도 상당했다. KSCF는 학생운동 조직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지지하고 후원하는 관계였다. 계명대 민주화운동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은 1978년 11월 결성된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이었다. 이를 매개로 대구․경북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연결되었고, 서울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1979년 9월 4일 대구의 3개 대학(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연합시위가 준비되었으나, 계명대만 성사되었다. 이 일로 수배 상태에 놓여 부산, 울산, 원주 등으로 도피하다가 민주화의 봄 국면을 맞았다. 남민전과는 관련이 없었다. 계명대에 복학하고 학원민주화운동 등에 참여했다. 특히 5월 14일 가두시위가 크게 전개되었고 대거 검거되었다. 김균식도 당일 연행되어 남부경찰서를 걸쳐 50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소요죄가 적용되어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1982년 8월 15일 석방되었다. 1983년부터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준비하다가 1984년 임진호의 권유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낙향했다. 1985년 결성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사회부장으로 참여했다. 이후 1980년대 대구지역 민주화운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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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어린시절 성장과정, 대학교 써클(후사연) 활동, 교련철폐운동, 민주수호운동 활동, 87년 민주화 시국 선언, 민교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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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균김승균은 4.19혁명에서부터 남북교류운동에 이르기까지 반독재투쟁과 통일운동에 진력한 대표적 인물이다. 《사상계》 책임편집인 시절 5.16쿠데타 9주년을 맞이하여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고발하고자, 당시 동빙고동 ‘도둑촌’이라 불리던 곳을 소재로 한 《사상계》 5월호의 권두시를 쓰도록 김지하에게 청탁한 것이 담시 ‘오적(五賊)’이 탄생하게 된 경위였다.구술자는 ‘오적(五賊)’이 실린 《사상계》가 3일 만에 매진되고, 야당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려 20만 부기 발간되어 큰 파문이 일자 박정희 정권이 탄압하고 사건이 수습되는 과정을 소상히 진술하였다. 또한 《사상계》가 폐간되기 전 《조선일보》가 인수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또한 《민주전선》에 실린 ‘오적(五賊)’에서는 박정희와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군 ‘장성’을 뺀 ‘4적(四賊)’이었다는 것과 김지하의 처음 원고에는 ‘오적(五賊)’을 고발한 ‘꾀수’가 잡혀가는 것으로 끝났는데, 구술자가 지적하여 ‘오적(五賊)’이 벼락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나게 했다는 대목은 이번 구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구술자는 ‘오적(五賊)’사건 이외에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민주수호청년협의회의 창설 등 민주화 투쟁에 관한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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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구술자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부산대학교 학생운동, 부마항쟁, 5·18항쟁, 6월항쟁 등과 재야활동 및 정당활동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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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김재수는 1960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출생하여 청주시에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일본으로 징용되었다. 광복 후, 아버지는 귀국했으나, 큰아버지는 일본에 있었다. 아버지가 청주지방법원 공무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보면, 큰아버지의 미입국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김재수가 민주화운동으로 연행되어 조사받을 때는 문제가 되었다. 청주제일교회 바로 옆에서 거주한 인연으로 일찍이 신자가 되었고, 학생반 활동을 했다. 1978년 충북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얼마 후 기독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청주제일교회 박종희 선배로부터 사회과학 서적과 학습을 제안받아 활동했다. 그해 여름에는 청주고 출신 선배들의 주선으로 서울대, 고려대, 충북대 동기들이 모여 연합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 1978년 8월, 박종희의 주선으로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대회에 참가했다가 시위에 참여했다. 현장에서 연행되어 청주로 이송되어 조사받고 석방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1978년 2학기부터 서울대 이대현 선배와 연결돼서 학습과 서울지역 학생운동 활동가들과 지도 라인을 형성하고, 1979년 3월 경영학과, 사회학과를 중심으로 국제문화연구회를 창립했다.
1980년 초부터 국제문화연구회와 미래문제연구회 중심으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학생 자치 조직을 새롭게 조직하고자 노력한다. 1980년 4월 충북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이 지지한 인물이 낙선한다. 따라서 청주제일교회와 국제문화연구회, 미래문제연구회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5월 15일에 청주 상당공원까지 대규모 인원이 진출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청주에서 유래가 없던 일이었다. 곧바로 수배령이 내려져서 여러 지역으로 도피하다가, 6월경 청주경찰서에 자수해 구속되었다. 청주 보안대에서 구타와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81년 1월 영등포구치소에서 선고유예로 출소했고, 그해 5월 강제징집 되었으며, 녹화사업을 받았다. 1983년 12월 전역하고, 1984년 3월 복학해 충북대학교 학생운동 조직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언더 조직에서 활동했으며,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준비했다. 1985년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충북민협) 결성에 참여했고, 이후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다. 충북민협은 충북지역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했으며, 4‧27 ‘군사독재 타도 및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충북도민실천대회’를 역대 최대 규모로 치렀다. 4‧27시위와 5‧3인천민중항쟁에 참여한 것을 이유로 체포되었고, 청주교도소와 춘천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7년 7월 9일 출소 이후에는 대전에서 노동 현장에 투신을 준비했다. 1988년 민중의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며, 선거 이후에는 연합단체에서 활동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것을 보고는 노동운동에 투신해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우진교통 정상화에 참여해 현재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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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김진태는 1954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했다. 1973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을 모색하다가, 1975년 계명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앞에서 재수하는 동안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었다. 계명대에 입학하자마자 친구의 권유로 서클 ‘유토피아’에 참여했고, 선배들과 교류하면서 4‧19기념행사에 참석했다. 1975년 6월경, ‘유토피아’ 회원들과 함께 김상진 열사《양심선언문》과 《4‧19선언문》을 제작․배포했다. 1976년 군 복무를 하던 중에 유인물을 배포한 일이 사건화되면서 보안사에 체포되었고, 육군교도소에 구금되었다. 유인물 배포 사건에는 6명이 관련됐는데, 1976년 6월경에 3명이 군 복무 중이었다. 3명은 군사재판을 받고 10년 형을 선고받는 등 심각한 고초를 겪었다. 최종 1년으로 감형돼서 군 복무를 마치고, 1979년 1월 전역했다.
1980년 2월부터 계명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아 학교 당국과 복학에 관한 문제를 협의했다. 계명대 학원민주화운동과 총학생회 조직 구성 및 선거에도 힘을 기울였다. ‘민주화의 봄’ 국면에는 계명대 시위뿐만 아니라 경북대, 영남대 3개 대학 연합시위를 조율하고 준비했다. 그리하여 5월 14일 대구백화점 앞에서 연합시위가 계획되었다. 당일 계명대 학생들은 먼저 시내로 진출해 대구백화점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며 다른 대학 학생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경북대와 영남대 학생들은 합류하지 않았고, 계명대 학생들만 경찰과 충돌하는 등 시위를 전개하다 연행되었다. 경찰의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은 파출소 2곳과 차량 3대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연행된 계명대생들에게는 소요죄가 적용되었다. 5월 15일 휴교령이 내려졌고, 16일 저녁 서울에서 위험하다는 연락이 내려와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도피했다. 수배 생활을 하다가 6월경 체포돼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구술자는 1982년 8‧15특사로 출소하고, 경북대 북문 앞에 우리문화사라는 복사실을 개업했다. 우리문화사는 대구 시내에서 소요되는 유인물과 팸플릿을 도맡아 제작했다. 1984년에 두 번째로 복학해서 임진호, 김균식 등과 함께 민요연구반을 설립하고,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1985년에는 이강철의 주도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경북지부가 결성됐는데, 상임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1985년부터 한동안 대구지역 사회운동은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86년에는 4월 5일 신민당 개헌현판식, 5월 문익환 목사 계명대 초청강연회 등을 전개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본부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6‧10민주항쟁에 소요되는 유인물을 제작했다. 한편 1985년 우리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대표로 활동했으며, 대구지역 문화운동의 성장에 중역을 담당했다. 그 밖에도 낙동강페놀유출사건, 미군기지 이전 문제 등 대구지역 사회운동의 주요 현장들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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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욱출생과 가족관계, 학창시절, 양서협동조합, 부림사건, 영락교회사건, YMCA활동,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조직, 저서와 출판, 민주화운동에 대한 감회
하이라이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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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열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부산대학교 학생운동, 부마항쟁, 5·18항쟁, 6월항쟁, 7,8월 노동자대투쟁 등과 이후 노동운동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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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영주
목영주는 1947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출생했다. 대한중석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1958년에 사망했다. 1962년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봄 상경하여 종로 2가 관철동의 제일제약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얼마 후 친구 소개로 견지동 30번지의 휘문출판사로 이직했다. 출판사의 특성상 지성인들과 안면을 갖게 되었고, 함석헌, 이희승 등의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씨알의 소리≫, ≪대화≫, ≪현존≫을 읽으면서 사회의식을 형성했다. 1969년경 강원도 춘천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1970년에 춘천지사장으로, 1971년 강릉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1970년대 강원도 춘천과 강릉은 민주화운동의 기반과 활동은 희미했다. 특히 강릉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강원대의 영향은 춘천 중심으로 미쳤다고 봐도 그르지 않다. 강릉은 천주교와 천주교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이 힘겹게 전개되었다. 목영주는 춘천에서는 죽림동성당을, 강릉에서는 임당동성당을 매개로 활동했다. 목영주가 몸담았던 주요 단체는 명경회, 강릉신협 등이었다. 강릉의 천주교는 원주교구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래서 목영주의 활동은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등의 지향과 유사했다. 1979년 6월 29일 감시를 받고 있던 함석헌 댁을 방문한 바 있고, 1980년 3월 1일 함석헌을 강릉으로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1980년 초반에는 하슬라학당을 설립 운영했으며, 1986년에는 ≪새벽들≫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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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숙
문정숙은 1955년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출생했다. 1973년 군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진학했다. 유년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고 성경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1975년 같은 과 동기인 진창덕이 성경 공부를 같이하자고 권유해서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활동에 참여한다. KSCF 활동을 하면서 학습하고, 전북지역 KSCF 회원 및 선배들과 교류 및 유대관계를 맺었다. 긴급조치라는 엄혹한 시기였지만, 종교적 신념을 갖고 활동하면서 집회 및 청년대회 등에 참여했다. 1977년 4월 전북대학교 유인물 배포사건으로 최인규, 손인범, 최갑선 등이 구속되고, 신일섭과 조용민이 학사징계를 받았다. 문정숙은 이들의 재판과 면회를 다니면서 지원활동을 했다.
1978년 전북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면서 자금 지원과 민주화운동 참여자의 도피처를 제공했다. 그해 전주에서 열린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주대회의 교육과 시위에도 참여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에서도 자금 지원과 후원 활동을 했는데, KSCF에 참여한 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해 학생운동의 저변이 확장되었음을 느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에도 수배자의 도피 자금과 도피처를 제공하거나 구속자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 1981년에는 구속자 후원 활동을 함께 한 동료들과 ‘수정’이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수정’ 회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 후원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운동 현장에 직접 투신하기도 했다.
문정숙은 1981년 2월 ‘수정’ 회원인 김현숙, 박현진, 이진심과 노동 현장에 투신했다. 하지만 자신이 노동 현장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농촌 현장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때 이효율을 통해 농촌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김윤, 강기종 부부를 만나게 된다. 1981년 12월, 문정숙과 김윤 부부는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덕천리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농촌공동체 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은 임마누엘 동산이라고 불렸다. 이곳에 박찬숙 부부 등이 추가로 이주했다. 하지만 농사짓기가 쉽지 않았고, 공동체 생활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1984년 풀무원에서 교육받았고, 1985년 고창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이맹수와 결혼하면서 순창을 떠났다.
고창에서는 기독교농민회에 참여해 삼양사 소작답 양도투쟁, 소싸움, 고추싸움 등 농촌 현장을 돌며 투쟁했으며, 마을 교육, 부녀 교육을 다니며 활동했다. 그러나 생활을 영위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90년 고창을 떠나 군산으로 이주했다. 이후 농사와 양계, 보험업과 과외 등을 하며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1992년 푸른군산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을 시작으로 협동조합, 먹거리, 학교급식 등 관련 시민단체 활동을 전개했고, 방폐장(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나 군산 미군기지 등 지역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