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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식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균식
면담자
정호기, 양라윤
구술일자
2023.7.4.
장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
구술시간
3시간 27분 58초
구술아카이브 > 1970년대 민주화운동 > 유신 후기 지역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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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김균식은 1958년 1월 대구시 남산동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가족 중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여럿이었다. 1977년 계명대에 입학해서 경북대 민주화운동으로 제적되고 계명대에 새로 입학한 박명규를 만난다. 계명대는 1975년 홍정회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1970년대 중반에 두드러진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계명대 민주화운동은 고등학교 인맥 중심으로 연결되는 현상을 보였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의 여파도 상당했다. KSCF는 학생운동 조직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지지하고 후원하는 관계였다. 계명대 민주화운동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것은 1978년 11월 결성된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이었다. 이를 매개로 대구․경북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연결되었고, 서울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1979년 9월 4일 대구의 3개 대학(경북대, 계명대, 영남대) 연합시위가 준비되었으나, 계명대만 성사되었다. 이 일로 수배 상태에 놓여 부산, 울산, 원주 등으로 도피하다가 민주화의 봄 국면을 맞았다. 남민전과는 관련이 없었다. 계명대에 복학하고 학원민주화운동 등에 참여했다. 특히 5월 14일 가두시위가 크게 전개되었고 대거 검거되었다. 김균식도 당일 연행되어 남부경찰서를 걸쳐 50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소요죄가 적용되어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1982년 8월 15일 석방되었다. 1983년부터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준비하다가 1984년 임진호의 권유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낙향했다. 1985년 결성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사회부장으로 참여했다. 이후 1980년대 대구지역 민주화운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역할을 했다.


- 출생과 가정환경, 민주화운동 참여와 가족사

- 대구‧경북 민주화운동 정리의 미흡과 계명대 상황, 1977년 계명대 입학, 박명규를 비롯 여러 인물을 만남

- 1970년대 중반, 계명대 학생운동, 1970년대 계명대 학생운동의 주요 인물과 인맥

- 1978년 9월 대구양서이용협동조합 창립에 참여

- 1970년대 후반기 대구‧경북 대학들의 연계, 1970년대 후반기 계명대 학생운동

- 1979년 대구‧경북 학생운동, 1979년대 9월 4일 계명대에서만 시위 성공

- 1979년 말부터 1980년 2월까지 도피 생활

-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에 참여, 울산‧원주 등으로 도피

- 1980년 민주화의 봄 국면 계명대 상황

- 1979년 9월 4일 시위의 피해, 1980년 5월 계명대의 민주화운동

- 1980년 5월 대구‧경북 각 대학의 피해, 1980년 5월 계명대의 시위

- 1980년 5월 50사단으로 연행, 1980년 5월 14일 계명대의 시위와 참여자 연행, 조사

- 1983년부터 노동운동을 준비

- 1985년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결성에 참여

- 1986년 4월 5일 신민당 대구 개헌 현판식

- 1987년 대구 6월항쟁, 1980년대 후반 이후 대구에서의 민주화운동

- 1970년대 후반기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23_유신 후반기 민주화운동_구술자료 상세목록_김균식.pdf 146073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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