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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사업개요
- 1980년대 지역민주화운동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의 7차년도 과제인 '1980년대 지역민주화운동' 구술 채록은, 유신 후기 지역 운동사를 조명했던 2023년 ‘유신 후반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 구술채록’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었습니다. 지역 민주화운동은 활동가 1인이 수행한 역할이 다층적으로 중첩되는 특성을 지니나, 이를 실증할 문헌 사료는 매우 제한적인 실정이다. 본 채록은 이러한 사료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 공공 기록 및 문헌에서 누락된 지역 활동가들의 생생한 증언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구술 범위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의 봄’을 거쳐 1980년대 전반기에 이르는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당시 구축된 인적·조직적 토대가 6·10 민주항쟁의 지역적 기반으로 전이·확장되는 과정을 고찰하고 채록에 담아냄으로써, 지역 민주화운동사의 실증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김진태
- 면담자
- 정호기
- 구술일자
- 2024.7.26.
- 구술장소
-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
- 구술시간
- 3시간 14분 57초
구술컬렉션 > 1970년대 민주화운동 > 유신 후기와 80년대 전반기 지역 민주화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4. 7. 2.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
1975. 3.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1975. 4.-6. 25. 서클 ‘유토피아’에 가입. 유신헌법 반대 ‘4‧19선언문’과 ‘김상진 유서’ 제작 배포에 참여
1975.11.-1978. 1. 군 복무
1976. 6. - 1977. 9. 21 군 복무 중 긴급조치 9호,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선고
1979.11.-1980.5. 학원민주화운동 등에 참여. 계명대 복학생대책협의회 회장
1980. 6.말경 도피하다 구속.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형 선고
1982. 8. 15. 김해교도소에서 특사로 석방
1983. - 1993. 경북대학교 북문 앞에서 우리문화사 경영
1984.3.-1986.8. 계명대학교 복학, 졸업
1984. 4. 19. 1980년대 이후 계명대에서 첫 4‧19기념식 개최
1985. 1. 30. - 1989. 1. 21.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경북지부 상임위원
1985. 우리출판사 개업. 우리문화연구회 대표
198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본부 실행위원
1988. 3. 29. - 1991. 3. 1. 한겨레민주당 대구‧경북지부 대구 동구 위원장
1988. 11. 12. 계명대학교 민주동문회 창립에 참여
1989. 결혼, 대구‧경북 지방자치연구소 이사, 민주개혁 정치모임 이사. 민주당 미군기지 이전 대책위원장, 새정치와 개혁을 위한 민주연합 대구‧경북 공동대표
1991. 3. 수돗물페놀오염대책시민협회의 공동대표, 민주당 페놀 식수오염 진상조사단 단장
1992. 4. 10.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1993. 대구환경운동연합 이사
1993.6. - 1997.6. 계명대학교 총동창회 제31-32대 부회장
1996. 4. 11.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2002. 12.-2003. 2.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
2003. 5. 23. - 2008. 4. 15. 경북관광개발공사(현 경상북도문화관광공사) 사장 , 1980년대 민주화운동 대구‧경북동지회 회장
2018. 2.-2020. 2. 노무현재단 대구‧경북 지역위원회 상임대표
2018. 9.-2021. 10. 경북대학교병원 감사
2022. - 현재 마당 운영
- 구술내용 요약
-
김진태는 1954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했다. 1973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을 모색하다가, 1975년 계명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앞에서 재수하는 동안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었다. 계명대에 입학하자마자 친구의 권유로 서클 ‘유토피아’에 참여했고, 선배들과 교류하면서 4‧19기념행사에 참석했다. 1975년 6월경, ‘유토피아’ 회원들과 함께 김상진 열사《양심선언문》과 《4‧19선언문》을 제작․배포했다. 1976년 군 복무를 하던 중에 유인물을 배포한 일이 사건화되면서 보안사에 체포되었고, 육군교도소에 구금되었다. 유인물 배포 사건에는 6명이 관련됐는데, 1976년 6월경에 3명이 군 복무 중이었다. 3명은 군사재판을 받고 10년 형을 선고받는 등 심각한 고초를 겪었다. 최종 1년으로 감형돼서 군 복무를 마치고, 1979년 1월 전역했다.
1980년 2월부터 계명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아 학교 당국과 복학에 관한 문제를 협의했다. 계명대 학원민주화운동과 총학생회 조직 구성 및 선거에도 힘을 기울였다. ‘민주화의 봄’ 국면에는 계명대 시위뿐만 아니라 경북대, 영남대 3개 대학 연합시위를 조율하고 준비했다. 그리하여 5월 14일 대구백화점 앞에서 연합시위가 계획되었다. 당일 계명대 학생들은 먼저 시내로 진출해 대구백화점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며 다른 대학 학생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경북대와 영남대 학생들은 합류하지 않았고, 계명대 학생들만 경찰과 충돌하는 등 시위를 전개하다 연행되었다. 경찰의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은 파출소 2곳과 차량 3대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연행된 계명대생들에게는 소요죄가 적용되었다. 5월 15일 휴교령이 내려졌고, 16일 저녁 서울에서 위험하다는 연락이 내려와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도피했다. 수배 생활을 하다가 6월경 체포돼서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구술자는 1982년 8‧15특사로 출소하고, 경북대 북문 앞에 우리문화사라는 복사실을 개업했다. 우리문화사는 대구 시내에서 소요되는 유인물과 팸플릿을 도맡아 제작했다. 1984년에 두 번째로 복학해서 임진호, 김균식 등과 함께 민요연구반을 설립하고,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1985년에는 이강철의 주도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경북지부가 결성됐는데, 상임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1985년부터 한동안 대구지역 사회운동은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86년에는 4월 5일 신민당 개헌현판식, 5월 문익환 목사 계명대 초청강연회 등을 전개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본부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6‧10민주항쟁에 소요되는 유인물을 제작했다. 한편 1985년 우리문화연구회를 창립하고 대표로 활동했으며, 대구지역 문화운동의 성장에 중역을 담당했다. 그 밖에도 낙동강페놀유출사건, 미군기지 이전 문제 등 대구지역 사회운동의 주요 현장들에서 활동했다.
- 대구시
- 계명대학교
- 홍정회
- 유토피아사건
- 《양심선언문》
- 《4‧19선언문》
- 보안사
- 5관구
- 반공법
- 육군교도소
- 곡주사
- 엠네스티 대구지부
- 복학생협의회
- 5‧14연합시위
- 소요죄
- 남부경찰서
- 동서문화관
- 안동 마리스타 수도원
- 학원민주화투쟁
- 춘광원
- 청주교도소
- 우리문화사
- 민요연구반
-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 우리문화연구회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본부
- 우리출판사
- 사회운동연구소
- 4‧5개헌현판식사건
- 6‧10민주항쟁
- 문화운동
- 1987년 대통령선거
- 계명대학교 민주동문회
- 낙동강페놀유출사건
- 경북 환경운동연합
- 김동환
- 박병기
- 백현국
- 강봉기
- 서석국
- 장의식
- 서태열
- 김영우
- 최이수
- 임종호
- 장선복
- 이현세
- 임진호
- 김균식
- 권오국
- 이강철
- 문익환
- 이흥록
- 최성묵
- 김광일
- 이태헌
- 김재호
- 함종호
- 배해진
- 최해룡
- 정문수
- 이헌철
- 석운하
- 배설남
- 유연창
- 유동인
- 김재엽
- 하종호
- 이현근
- 권용혜
- 김부겸
- 변대근
- 도진용
- 박종덕
- 임규영
- 김충환
- 신기복
- 남영주
- 최정돈
- 김학기
- 최열
- 조성우
- 이재용
- 송필교
- 명진
- 현응
- 종림
- 종태
- 권종대
- 정재돈
- 김대중
- 김영삼
- 노태우
- 박계동
- 배창환
- 도종환
- 제정구
- 유인태
- 원혜영
- 임구호
- 장영달
- 이호웅
- 김지숙
- 전점석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1980년 5월 14〜16일 계명대학교 민주화투쟁기간 활동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