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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준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강준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박정수)
구술일자
2010년 7월 30일
장소
대전 의정신문사
구술시간
2시간 5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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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당시 선린상고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문 고등학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야구부, 농구부 등의 다양한  운동부와 동아리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학생들 간의 연대감이 높았다. 구술자는 당시 선린상고 1학년 재학 중이었다.
4‧19 이전 선린상고 학생들 즉, 당시 고등학생들이 갖는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통령각하 탄신 기념 글짓기 대회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 머리는 서리가 맞아서 하얗다.’고 쓴 학생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신문배달과 초등학생들 과외를 했던 구술자는 학생 대부분이 담배를 피우는데 구술자만 안 피울 정도로 모범생이어서 규율부를 했다.  규율부는 3학년 선배 부원들과 얘기가 많았는데 선배들이 시켜 다른 학교 규율부와 연락을 하곤 했다.  4‧19가 지나 공무원이던  부친이 그만 두었을 때는 군수를 찾아가 항의로 혈서를 쓰기도 했다.
자유당과 이기붕 일가, 그리고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은 대부분의 선린상고 학생들이 공유했다. 특히, 4‧11  김주열 학생사건은 이러한 인식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얘기를 나누었고  선생님들은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이면 규율부를 평소보다 많이 배치하는 등 단속을 강화했다. 4‧18 고려대 시위가 알려지면서  선린상고 역시 분위기가 뒤숭숭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무언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우리도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들이 팽배했다. 단속 역시 강화되었는데 구술자도 선생님 지시로 단속에 나섰다. 그때 선배들은 각 학교 서로 연락하는 것  같았다. 18일에 특별히 다음 날 행동을 준비하는 것은 없었지만 서울시 전체 휴교령이 내려지지 않을까 하는 얘기들을 하면서 다들  술렁거렸다.
4월 19일 학교를 가니 휴교를 알리는 방이 붙어 있었고 문이 잠겨 있었다. 수위 아저씨에게 따달라고 해서 들어가니 운동장에 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8시가 채 안 되었을 때였다.
9시 넘어 2천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운동장에 모여서 성명을 발표하고 학교를 나갔다. 문이 잠겨 있어 담을 넘기도 했다. 교문을  나옴과 동시에 학교 주변에 있었던 당시 자유당의 거물인 한희석의 집을 쳐들어가 부수기도 했다. 지하에 내려가니 설탕이 쌀 포대처럼  지하에 천정까지 닿게 잔뜩 쌓여 있었다. 서울역으로 가자는 외침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은 최균환 박사 집으로 갔다. 책들만  빼곡한 집을 보고는 이런 사람은 덩달아 희생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원효로 입구로 나와 만리동 쪽으로 가니 경찰들이 다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만리동파출소를 들어가니 먼저 온 사람들이 불을 질러  집기들이 타고 있었지만 유리창을 깨고 물건을 부수고 하였다. 파출소를 나오니 아현동 고개 쪽에서 아마도 배문고 학생들로 짐작되는  학생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염천교에서 신촌에서 몰려오던 연세대와 이대 시위학생들과 합류하여 스크럼을 짜고 서울역으로 행진했다.  당시 서울역에는 곳곳에서 밀려온 수만의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있었다. 남대문으로 가니까 영등포공고 학생들이 소방차를 탈취해  운전을 하고 있었고 본네트 위에 부상자가 실려 있었다. 남대문 있을 때 남산 쪽에서 새카맣게 사람들이 내려오는데 용산고  학생들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여기서 스크럼을 짜서 이동하는데 대열이 이십 명 정도 되었다. 사람이 많아지니까 시민들 호응도 커졌고  바가지에 물을 떠서 갖다 주기도 했다. 가다보니 시청이 나왔고 거기서 사람이 너무 많아 뒤로 밀려나는데 서울신문사 불타는 게  보였다. 경무대 쪽에 바리케이드 치고 경찰들이 총을 쏜다는 얘기가 들렸다.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안 가고 하니까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했는데 총 소리가 따다다 들렸고 좀 밀리다 보니 스크럼 짰던 사람이 점점 무거워져서 살펴보니까 총을 맞았는지 피를 흘리면서 실신해 있었다.
총소리와 함께 대열이 풀어졌고 주택가로 가서 대문을 두드렸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아 왔던 길로 해서 되돌아오는데 세종로 쪽으로는 못  나오고 고려병원 쪽으로 해서 만리동 쪽으로 왔다. 한희석네 불 지른 것도 있고 해서 집으로는 못 갔다. 밤에 학교에 숨어 있다가  하숙집에 가니 형사인지 사복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골 갔다고 그랬다는 소리를 들었다.
4‧19 직후 시위주도 학생들은 피신하게 되는데, 구술자 역시 시골 고향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구술자는 이를 통해서 당시 시민들의 4‧19에 대한 뜨거운 지지를 알 수 있었다 한다. 4‧19 직후 선린상고의 시위  참여는 구술자의 피신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4‧25 대학교수 시위, 4‧26 이승만의 하야 성명을 들으면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4‧19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강준(서울중고등학생)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7768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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