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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중/안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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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김달중/안병준
면담자
현대사기록연구원(신동호)
구술일자
2010년 11월 11일
구술장소
연세대학교 박물관
구술시간
1시간 52분 17초

구술컬렉션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김달중 1938년 출생 안병준 1938년 출생 김달중과 안병준은 1960년 당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학생으로 4월혁명연구반 활동으로 하면서 4월혁명에 대한 자료와 기록 전반을 수집, 정리
구술내용 요약
김달중은 경기고등학교 학생위원장 출신으로 전국 고등학생 대표 역할을 하다가 1957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안병준은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동신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같은 해에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진학했다. 두 사람은 정치학도로서 독서회 등의 활동과 문과대학 과목을 같이 수강하면서 친분이 두터워졌고, '정외과 문과대생'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쌓았다.

4월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 두 사람은 정외과 4학년생으로서 연세대 4‧19 시위에 참여했다. 김달중은 당시 연세대 학생 조직을 사실상 대표한다고 할 기독학생회[SCA] 회장직에 있었다.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의 정서를 대변하거나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김달중은 4‧19 시위를 직접 주동하거나 시위 조직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4월혁명과 관련해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은 후세 학자들을 위한 사료로서 4월혁명에 대한 자료와 기록 전반을 수집‧정리한 것이었다. 4‧19 시위가 일어난 뒤이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기 이전, 즉 계엄 상태인 1960년 4월 23일쯤에 이들이 만든 4월혁명연구반의 활동과 결과물이 바로 그것이다. 4월혁명연구반의 활동은 한미재단 단장이자 호러스 언더우드의 친동생인 리처드 언더우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 그는 4‧19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달중에게 4월혁명 관련 자료의 수집을 제안했다. 김달중은 안병준과 함께 연구반을 만들어 4‧19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한미재단의 자금 지원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중간에 문제가 생겼다. 한미재단 본부에서 허가 없이 진행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리처드 언더우드 단장도 후속 작업은 두 사람이 독자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한 것이다. 두 사람이 김하태 연세대 대학원장에게 도움을 구한 결과 연세대 대학원 프로젝트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김하태 원장과 홍이섭 교수, 조승순 박사가 4월혁명연구반의 지도교수를 맡았다. 
4월혁명연구반은 초기에 주로 서울지역을 대상으로 4‧18과 4‧19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이 구축해놓은 와이엠시에이라든가 기독학생회 같은 기독교 학생 조직의 인맥, 연세대와 서울대‧고려대 3개 대학 정외과 네트워크 등이 주로 활용되었다. 나중에는 범위를 확대해 관계 기관은 물론 대구와 마산 등 지방에 가서 2‧28, 3‧15 등을 수집하는 일도 하였다. 4‧19에 참여한 일반인 대상 설문조사와 시위 주동자, 부상자 면담조사도 실시하였다.

자료 수집 작업은 김달중‧안병준 두 사람이 진행했다. 나중에 김달중이 7월과 8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와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각각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세계대회와 세계청년회[WAY] 제8차 이사회 등의 국제회의에 한국 학생 대표로 참석하면서 손이 모자라 마지막 정리 단계에서 정외과 동급생인 박충석이 가세한 것이 전부다. 이렇게 인원을 제한한 것은 그 일이 민감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4‧19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조사자나 자료 제공자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대구 2‧28운동의 주동자인 이대우는 자료를 넘겨주면서 그 점을 매우 걱정을 하였다.

두 사람은 오로지 당대에 없어질 수 있는 사료를 후세의 학자들을 위해 충실하게 남긴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수집한 자료는 10년 동안 비공개로 하고, 그들 스스로는 개인적으로 그 자료를 연구 목적 등으로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 원칙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이 자료를 이용한 연구, 강연, 자문, 토론 등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4월혁명연구반 활동과 관련한 본격적인 언급은 이 구술이 처음이다. 
당시 수집‧정리한 자료에 눈독을 들인 곳도 있었다.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인 그레고리 핸더슨이 자료를 한국에 두는 것보다 미국에서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며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집요하게 거절하였다. 두 달여에 걸쳐 수집‧정리된 4‧19 관련 기록은 결국 연세대 도서관 희귀자료실에 봉인해서 보관되었다. 

연세대 4‧19는 이념적인 색채나 정치색을 띠지 않은,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이 표출된 것이다. 4‧19 참여를 계기로 연세대는 그 후에 전개되는 학생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6.3사태라든가 10.26 이후 5.18까지 전개된 학생 시위가 그렇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당시 이한열의 죽음과 더불어 연세대는 학생운동의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모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과 교무처장을 맡아 학생운동과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됐지만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학생을 보호하는 교수사회의 전통은 4‧19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것은 4월혁명을 통해 다져진 연세대의 전통이다.

4‧19는 뒷날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는 전국적인 기독청년조직의 탄생에도 영향을 주었다. 4‧19 직후 김달중이 학생 대표로 참여한 케이에스시에프 세계대회와 세계청년회 8차 이사회에서 한국의 4월혁명은 외국 관계자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그해 국제적 성원 속에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청년단체들이 서울 감리회관에서 모여 전국적인 청년운동체를 결성, 1960~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하는 조직적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4월혁명은 한국 현대사와 정치사의 큰 사건이지만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1960~7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절반이 민주화됐는데, 그 시발점이 한국이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평가가 있다. 개도국이 학생혁명을 통해 정부를 전복한 첫 사례일 것이다. 비록 번복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 모두에게 4‧19는 정치나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않고 학자의 길로 들어선 동기가 되었다. 


5. 기초자료 목록

연정60년사편찬위원회, 『延政六十年史 1945-2004』, 씨아이알, 2004
학민사 편집실,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93(5판)
사월혁명연구소 편, 『한국 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 한길사, 199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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