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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긴태

구술자소개

구술자
김긴태
면담자
이영재
구술일자
2010년 11월 5일
장소
4‧19민주혁명회
구술시간
2시간 2분 50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서울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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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1942년 5월 24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1958년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정읍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집안은 중농으로 서울로 고등학교 유학을 보낼 정도의 여력이 있었다. 구술자는 1958년 서울 만리동 고개에 있는 균명고등학교를 선택하여 진학한다. 당시 학교의 외형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균명고등학교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일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다. 고교 재학 중에는 규율부 활동을 하였다. 1960년 4월 구술자는 균명고 2학년 재학 중이었다. 
구술자는 정치적 관심이 많았다. 1960년 2월 경에는 야당의 유세에 수업을 빠지면서 구경 갈 정도였다. 구술자는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유세에도 참여하였다. 구술자는 1960년 3월 14일 서울 광화문, 세종로 인근에서 전개된 고교생 야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시위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 학교 선생님의 보증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구술자는 4월혁명에 참여하여 총상을 입고 입원하는 경험을 하였다. 4월 19일 당일에는 서울 시내 인근에서 지나가던 소방차를 잡아타고 서울 시내를 전전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같은 날 동대문경찰서 약 50미터 지점에서 손목에 총상을 입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대통령의 하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시위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많이 느꼈다. 그 후 대통령의 하야 발표가 있고 나서는 사회적 분위기도 급반전 되어 위로금 등을 수령하였다고 한다. 퇴원 후 구술자는 재학 중이던 균명고에서 4월혁명 부상자로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구술자는 대학 진학 후에도 4월혁명의 정신으로 군부정권에 대한 비판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고초를 받았다. 1963년 2월 민정이양을 번의한 박정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하여 유인물을 제작하여 직접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이로 인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63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이 4‧19공로자들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구술자는 당시 건국포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할복하였다. 그 후에도 박정희 정권 반대 시위를 지속하였다. 현재는 4‧19민주혁명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인 4월혁명 정신계승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김긴태(서울중고등학생2)_구술자료상세목록.pdf 83368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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