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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효

구술자소개

구술자
장주효
면담자
채장수, 이신용
구술일자
2010년 8월 2일
장소
대구대학교
구술시간
1시간 32분 12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대구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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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을 이끈 여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경상중학교 출신이다. 구술자는 경북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경상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2학년 때 운명적으로 이대우라는 친구를 만났다. 만나서 정말 형제같이 온갖 얘기를 나누며 지냈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들이 입시나 학력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자유로워서 그런지, 아니면 정치적 사안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그런  학생들과 주로 모여서 지냈다. 이후 경북고등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대구고등학교에 입학한 구술자는 학생회 회장에도 출마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결정적으로 이런 친구들과 광범위하게 어울리게 된 계기는 그 당시 경상북도 학무국에서 주최했던 도내 학도호국단  간부학생들의 수련회였다. 그때 경북고에서 이대우, 경북대사대부고에서 최용호, 대구고등학교에서 구술자 본인과 이성실이라는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 참가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주 의기가 투합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2‧28대구민주화운동을 이끈 학생들의 끈끈한 인연을 찾을 수 있다고 구술자는 생각한다. 더불어 2‧28대구민주화운동과 결정적인  연계는 없지만 농촌봉사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때 '새날동지회'라는 범 대구지역 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 위에 언급한 친구들을 포함하여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농고의 학생들이 교류했다. 이 또한 2‧28대구민주화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것이 아닌가라고 구술자는 생각했다. 
해방이 되고 난 후에 소위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것 중 좋은 측면은 토론문화가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인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갈 당시 언론의 자유는 지금과 비교해도 놀라울 정도였다고 구술자는 회상한다. 특히 당시에 소위 야당지라고 하는  동아일보의 여당에 대한 비판적 논조가 아주 대단했으며 대구지역의 대구매일신문과 영남일보, 대구일보, 또한 여론 선도에 있어 많은  역할을 했다. 
또한 당시에 못 살았기 때문에 정치 과잉이 아니었나 하는 측면과, 다른 한편으론 교육에 의해서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면서도 활발했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당시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상당한 정치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대구라는 지역사회가 지금과는 달리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출마해서 야당의원으로 많이 당선이 될 만큼 굉장히 역동적이고 여당에 비판적이었던 야당도시였다고  말한다. 심지어 4‧19 이후에 진보세력들이 대구에서 아주 큰 활동을 했었다고 회상한다.  
대구고의 학생들은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이 많이 입학함에 따라 학생들은 차후 대학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입시공부에  치중하였고 그에 따라 그러한 모임들이 꽤 있었다. 반면에 정치모임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것이 별도로 없어도 될 정도로 당시  자유당의 폭정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공감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고에 일요등교 지시가 하달되었고 이에 따라 경북고의 이대우, 안효영, 대구고의 구술자와 손진홍 등이 중심이  되어 데모를 위한 사전계획을 논의하였다. 학교당국의 일요등교 지시는 학생들이 토요일에는 자유당이 신천에서 유세가 있으니 참여하도록  하고 일요일은 민주당이 하니 참여를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2‧28대구민주화운동 전날인 27일 저녁에 이대우의 집에서 이대우 본인과 전하섭, 권준하, 윤종명, 대구고의 손진홍, 구술자,  윤풍홍, 경북대 사대부고의 최용호 등이 모여 의논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요등교 지시가 부당하다는 데 뜻을 모았고 그에  따라 '선언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의논하였다. 경북고는 한 해 쉬고 있던 하청일 이라는 학생에게 결의문을 쓰도록  하고, 대구고는 25일에 일요등교 지시를 알게 되고 부당함을 공감할 시간이 많았던 경북고와 달리 준비가 많이 부족한 상태임에 따라  학생들을 독려해서 데모를 하자고 해야 될 입장이므로 선언문을 쓸 형편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대부고의 최용호에게 결의문 작성을  부탁하고 10시쯤 헤어져서 대구고의 학생들을 만나러 갔다. 
그래서 대구고 친구들에게 데모 계획을 설명하고 다시 이대우의 집에 오니 구술자와 손진홍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경북고 일부  대의원들이 와서 '데모는 곤란하다'고 함에 따라 데모의 실행 가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국 데모를 실행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구호와 데모 코스를 정하였다. 
2‧28 당일 손진홍이 사람을 몇 차례 경북고로 보냈으나 경북고로부터 교정 밖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이 없었다. 결국 손진홍이  경북고로 직접 갔고 그곳에서 '역시 어렵다'는 말을 듣고 "좋다! [너희들이 못 나가면] 우리라도 나간다. 나갔다"고  현재진행형으로 얘기하고 뒤돌아서니 경북고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속에 대구고 상황은 구술자 혼자서 상황을 주시하면서 학생들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손진홍이 허겁지겁 들어오면서 "나가자"고  함에 따라 150여 명의 학생들이 교정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했고 이후 데모의 전말을 알게 된 나머지 학생들도 거리로 진출하였다.  데모대는 남문시장에서 일차적으로 경찰에게 저지당하였고 반월당에서 이차적으로 저지당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시청과 도청으로  진출했다.
구술자는 데모대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손진홍, 장주효, 이대우, 안효영과 함께 취조를 당하였고 그러는 와중에 사대부고 학생들에 의해  저녁에 데모가 또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은 이들에게 선무방송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모든 건 끝났다. 학우들은  돌아가라. 우리는 승리했다'고 돌아다니며 선무방송을 했다. 
이후 구술자를 포함한 데모를 주도한 학생들은 경찰의 미행을 받았고 특히 이 가운데 이대우는 4월혁명으로 이어지는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또 다시 학생들을 선동할까봐 의심한 경찰에게 납치되어 구금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적어도 4‧19 공간에서 모두가 공감을 했지만 그 기폭제라고 하는, 그것도  고등학교 학생들이 의도를 가지고 자기 의견을 표현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여당의 폭정에 대한 반발이 당시 어느  곳에서든 일어날 시대적 배경이 있었지만, 그리고 사회적인 식견이나 뭐가 더 있을 수도 있는 대학생과 사회인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들이 했다는 것에 대해,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했다는 측면도 되고 또 한편으론 가장 때 묻지 않고 해서  나름대로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과감히 행동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한다.

5. 참고자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
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
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
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
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
《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
《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장주효(대구)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769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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