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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

구술자소개

구술자
최용호
면담자
채장수, 이신용
구술일자
2010년 7월 27일
장소
대구 구술자의 사무실
구술시간
1시간 10분 25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대구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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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943년 경북 의성 봉양면 도륜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도륜국민학교를 1회, 도륜의 봉양중학교를 4회로 졸업했다. 이후 경북대  사대부고로 진학하였다. 중학교시절 이순구라는 국어선생님이 구술자에게 웅변을 권하였고 이 과정에서 표현력을 배우고 외향적 성격이  되었다. 특히 구술자의 어머니가 도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여 중등시절에 신문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봉양중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역임하여 사회문제에 대해 일찍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웅변반에 가입해서 특별활동을 했는데 당시 상업을 담당했던 이목 선생님한테서 웅변을 배웠다. 이를 통해  대구 시내의 각 고등학교나 대학생들과 교류가 있었는데 특히 당시 '새날동지회'라는 대구 시내의 경북고, 대구고, 대구농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경북대 사대부고의 연합서클에서 주로 농촌 봉사활동을 통해 여러 학생들과의 교우관계를 맺었던 것이  2‧28대구민주화운동과정에서 타 교와의 연계과정에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1959년 여름방학 때 일주일 동안 경북 도내의  학도호국단 간부연수회가 포항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를 통해 대구경북의 중고등학생 간부학생들이 서로 알게 되었고 연수회를 마치고도 자주  만나고 같이 활동을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데모가 일어난 것이 처음이었지만 당시 데모를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숙달되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여러  관제데모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집단 활동에 익숙해져 있었다. 즉 반공데모, 관제데모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2‧28대구민주화운동의 경우 데모의 형식을 빌려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경북대 사대부고는 일요등교에 관한 지시를 제일 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러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늦었지만 26,  27일부터 같이 뭉칠 수 있었다. 27일 종례시간에 일요등교 지시가 하달되었고 학생들을 이미 흩어진 다음이라 이에 대해 의논할  여유가 없었다. 
그날 대구고 손진홍 학생위원장과 그의 친구 윤순홍이 구술자를 찾아와서 자기들은 아침에 얘기를 들었는데 '이래서 되겠는가' 하면서  경북고 이대우의 집에 가서 함께 논의해보자고 했고 해질 무렵 이대우의 집에서 3개 학교 학생들이 만났다. 당시 경북고의 경우 이미  시위 논의가 성숙되어 진행되고 있었고 대구고도 3명이 모였고 경북대 사대부고는 구술자 혼자였다. 이 자리에서 연합해서 시위를  하자고 결의하였다.
어느 누구한테 항변하더라도 학생들한테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젊은 학생들에게 휴식을 취해야 할 일요일에 나오라는  것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문제였다. 특히 당시 2‧28대구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한글세대로서 일제하에서  식민지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민주주의에 대해 배운 세대였다. 법치와 삼권분립에 대해 원론적으로 배운 그들에게 있어 당시의 정치  행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당장 일요일에 나오라고 하니 수긍할 수 없었고 이에 청순한  정의감이 뒷받침되어 2‧28대구민주화운동을이 표출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을 비롯해 기성세대는 고등학생들처럼 행동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특히 2‧28대구민주화운동이 있기 직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병옥이 2월 15일 미국에서 사망함에 따라 2월 16일  점심시간에 학교 교실 칠판에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가도 가도 가망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라는 내용의 당시 유행했던 '유정천리'의 가사를 바꿔서 적은  소위 '노가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학교 전체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이를 주도한 학생은 무기근신을 당했고 당시  학생회 부위원장이었던 구술자 또한 남대구경찰서에 호출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7일 이대우의 집에서 모인 학생들은 대구고, 경북대 사대부고, 경북고가 연합해서 데모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날 아침 구술자는 친구인 김영대를 찾아가 데모 계획을 알리고 언론에 이를 알리기로 합의했다. 이후 11시에 학생회를 소집해서  이에 관해 논의하는 가운데 12시쯤 경북고 쪽의 학생들이 경북대 사대부고 앞을 지나가면서 데모에 동참하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교문을 닫아 걸고 '전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내려서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갔고 학생회 간부들은 과학실에서  긴급 간부회의를 위해 모였고 교무주임, 학생주임 선생님들을 상대로 해서 '왜 부당하게 일요일 등교를 시키느냐'고 항의했다.  
당시 교무주임 선생님은 교정 밖으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을 만류하며 '태평양 한가운데 큰 물결이 흐르는데 젓가락 하나로 휘저어서  태평양의 물을 바꿀 수 있느냐, 부당하고 참 나쁠지라도 너희들이 더 공부하고 힘을 길러서 너희들 세대가 되어서는 이러지 않도록  지금은 참아라'라고 계속 설득했다. 이에 학생들은 교실에 모여 일요등교 지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농성을 시작하였고 이에 소식을  들은 신문사 기자들이 찾아와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저녁이 돼서야 대략 70-80명이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도지사의 관사로  가서 도지사를 만나 일요등교의 부당함을 따졌다. 
이후 3월 1일 남대구경찰서에서 이미 조사가 다 끝이 나고 시위를 했던 학생 간부들을 소집해서 서장은 '학생들이 순수해서 북괴에게  이용당하고 있으니 반정부 투쟁이 아니라 단순히 일요등교에 대한 항의였다'는 성명서를 학생대표들이 발표하라는 권유를 하였고  김영대가 '안 되겠다. 이런 자리에서 그런 내용을 더군다나 서장실에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이것이 오히려 우리의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며 반대하였고 결국 성명서의 발표는 없었다.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고민했던 사람으로서 모든 삶의 궤적에 하나의 자부심도 되지만  자신이 부정을 한다든지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었다든지 등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고  말하면서 당시 사회에 대한 반면교사가 되어 70 평생을 살면서 삶에 있어 크게 흔들리지 않고 걸어오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시기를 함께 겪었던 많은 친구들과 지금까지 소중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5. 참고자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
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
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
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
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
《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
《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최용호(대구)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5072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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