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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흠

구술자소개

구술자
홍종흠
면담자
채장수, 이신용
구술일자
2010년 7월 20일
장소
경산 한방산업단지
구술시간
1시간 49분 11초
구술아카이브 > 4.19혁명 > 대구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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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1943년 군위군 부계면 대을동에서 태어난 구술자는 어린 시절 대구로 나와서 달성초등학교와 경산의 경상중학교,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북고에 입학한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당시 경북고가 대구-경북지역에서 제일 좋은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경북고에 입학하여 두 종류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하나는 정식으로 시험을 치고 들어온 실력 있는 친구들과 다른 하나는 부모들의 배경이  좋아 들어온 친구들이었다. 이들 간에 알력은 크게 없었으나 성적 격차와 생활 격차가 있다 보니 친해지기 어려웠다. 즉 농촌  출신이고 못살아서 떠돌듯이 그리고 학비를 낼 수 있을지 말지를 모르던 구술자와 달리 부모들의 배경이 좋아 기부입학한 학생들은  대단한 행세를 하던 집안들의 자제들이어서 구술자의 부류와는 소통이 잘되지 않았고 구술자는 그러한 상황에서 사회현실을 깨달아 갔다.
2‧28대구민주화운동 직전 대구지역의 분위기에 대해 앞서 6‧25전쟁과 그 앞서의 10‧1사건을 겪으면서 좌우익 문제와 행정당국,  지배층과 억눌린 서민들의 갈등이 상당히 존재했다고 말한다. 특히 자유당 정권기에 아버지, 삼촌, 형님들은 조심조심 세상을  살았는데 왜냐하면 잘못하면 잡혀 들어가 두들겨 맞거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예전 칠레의 군사정부  피노체트 치하나 스탈린 치하, 남미의 군부정권, 아프리카의 일부 군부정권과 유사했으며 대상이 지배층 대 일반  피지배층[국민들]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구술자를 비롯해 당시 고등학생들은 이를 늘 예민하게 보아왔다. 
특히 대구 10‧1사건이나 조봉암이 이승만보다 득표율이 높았던 지역이 대구가 유일했고 이에 따라 대구를 모스크바라고 부를 정도로 야성이 강했으며 이것이 바로 당시 대구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자유당 독재가 6‧25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가혹한 상황에서 일반 국민들은 데모는커녕 반정부적인 말도 함부로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대구의 경북고 학생들이 어떻게 해서 최초로 그러한 반정부 데모를 할 수 있었는가? 즉 어디서 벤치마킹을 했느냐에 대해 구술자는  관제데모에서 벤치마킹을 했다고 보면서 당시 학생들이 온갖 관제시위에 많이 동원됨에 따라 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8일 당일 교정을 박차고 나온 약 500여 명의 학생데모대를 특별히 누가 나서서 주도하거나 대열을 이끈 사람은 없었으며  반월당으로 진출하였고 도청에서 최초로 경찰과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구술자를 포함한 일부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일부는 흩어져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였다.  
2‧28대구민주화운동에 관해 말하면서 구술자는 기념문집의 편집을 하면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2‧28대구민주화운동은 특정한 영웅이  지도를 해서 일어난 것이 절대 아니다. 발생의 제일 바탕은 그 당시 자유당 정부의 부패와 독재가 핵심적인 바탕이 되고 거기에  불을 지른 동기는 3‧15부정 선거를 획책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는 것이 도화선이었다. 그러나 이 도화선이 생겼을 때  거기에 빨리 불을 댕긴 것은 학생들인데, 그 학생들이 불을 댕기는 과정에서 당시 학도호국단의 학생 부회장, 일반 학급의 회장을  했던 친구들이 일부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학교의 분위기는 그 사람들이 안 나와도 2‧28대구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이미 풍선이 터질 만큼 부풀어 오른 상태에서 학생회 지도층이 역할을 한 것이며 논의의 초점을 맞추면  영웅적인 얘기만이 나올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경북고의 경우에는 결의문 낭독이 있었는데 당시 학생회 부회장이었던 이대우가 이를 읽었고 그리고 결의문을 빼앗길 때를 대비해  대독할 안효영 같은 친구들이 일정 부문 역할을 했다. 2월 28일 전에 학생회장이나 회장이 아닌 사람들이 밤에 모여 의논도 하는  등의 역할이 있지만 실제 당시 등교해서 보면 수업시간에도 그 문제로 인해 수업을 못하고 이 반 저 반 친구들이 복도에 서서  '이번에는 참아서는 안 된다'며 교내 전체가 불만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28대구민주화 운동 이후 학교로 돌아온 경북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교원노조운동에 동조해 단식농성을 벌였는데 구술자는 교원노조가  탄생된 배경에 있어 2‧28대구민주화운동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즉 '선생님들이 참교육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2‧28대구민주화운동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쉽게 말해 선생님들이 전제권력을 막아야 하는데 못 막아서 학생들이  터져 나온 것 아니냐' 하는 자괴감이 전국 교원노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에 경북고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지지를 하고 단식농성을  감행했다. 
구술자는 2‧28대구민주화운동이 첫째로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키고 꽃피우려 했다는 점, 둘째로 '횃불을 들어라 동방의  빛들아'라는 구호가 그 당시에는 생경하고 엉뚱하게 여겨졌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 속에 민족통일 문제를 비롯해서 한반도와 한반도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적 역량을 세계사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지며, 만약 언젠가 세상이  어두워지면 2‧28민주화운동이 전례로서 횃불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소산으로서  후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이것이 2‧28대구민주화운동의 정신이 오늘날 대구 지역에 지속적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5. 참고자료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횃불』 10-1, 2010.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 신문사, 2010.
2‧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Ⅰ‧Ⅱ‧Ⅲ, 경북인쇄, 2000.
채장수, 「2‧28 대구민주운동의 의미론: '민주화'의 성격을 중심으로」, 『대한정치학회보』 11-3, 2004.
이대우, 「2‧28 민주의거의 세계학생운동사에서의 위상」, 미상, 미상.
서태영, 「'2‧28'을 청년학생의 품으로…」,『온장』1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구지회, 2005.
《대구신문》(www.idaegu.co.kr), <2‧28 민주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력시간: 2010-02-25)
《대구신문》(www.idaegu.co.kr), <자유와 정의 외치며 민족혼 일깨워>(입력시간: 2010-02-25)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10_4월혁명50주년_홍종흠(대구)_구술자료상세목록.pdf 6845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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