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가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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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조구술자의 개인 이력, 결혼과 직장생활, 강경대 사망과 투쟁의 기억, 재판투쟁, 대학순회 홍보 활동, 유가협 회장 출마 배경과 활동, 유가협의 재정 문제와 수습과정, 사단법인 유가협의 분리과정,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대응 활동, 기념공원 추진 활동, 유가협 활동에 대한 평가, 유족의 동등한 대우 주장, 계승연대 활동, 광주에서 식당과 무료한방진료 활동, 개인적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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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학해남에서 나고 자란 아버님의 가정사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8남매 중 큰아들로 태어나서 동생들 공부시키기 위해 이른 나이에 농사일에 뛰어 들어 평생을 농사만 지어 온 아버님의 가슴에는 해남이라는 고장과 해남에서 자라는 농산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 강상철열사의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예전일을 회상하시면서 말씀해 주셨고 강상철 열사가 옥천에 있다가 1990년에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가게 된 이야기도 해주셨다. 오랜 시간 해남 농민회에서 일하셨고 호남 유가협에서도 회장을 맡아 헌신해 오신 이야기, 그리고 장가를 못가고 남은 아들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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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거성출생과 성장과정, 유가협 후원회 활동, 구민교회 개척, 유가협의 후원회 활동, 바람직한 유가협의 미래상, 반부패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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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아버님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완도에서 태어나 입대, 결혼 이야기까지 그동안 하고픈 말씀이 많으셨는지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로 오랜시간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들인 김석진열사가 그렇게 데모를 열심히 하고 돌아다녔는 줄은 모르셨다고 하시며 열사의 죽음 이후에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얘기해 주셨다. 호남지역 유가협 총무일을 오랜 시간 하셨고 그 이후에 회장을 맡아 작년까지 책임을 다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현재 어머님이 여러번의 골절을 겪으면서 몸이 많이 안좋다는 이야기와 김학수열사 돌아가시고 본인이 느낀 여러 가지 소회와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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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김성한은 1941년 경북 봉화군에서 출생했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큰 오빠와 17년 차이다. 큰 오빠를 잘 따랐고, 봉화가 워낙 산골이라 초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큰 오빠가 광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태백으로 갔으나 홍역에 걸려 고생하고 6.25 사변이 나서 입학만 해 놓고 정작 학교는 다니지 못하고 다시 봉화로 내려갔다. 18세에 아버지가 작고하시고, 1962년 결혼했다. 5남매를 낳고 봉화에서 키우다가 1982년 자녀 교육을 위해 경북 영주로 이사를 했다. 자녀들이 대학을 가고 하면서 1990년 서울로 상경했다.둘째 아들 심상득은 1989년 3월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학생운동을 했고, 19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구속된 아들의 행방을 몰라 애타던 중 큰 아들이 수소문하여 구술자와 함께 중부경찰서와 남산 안기부 인근에 갔다가 민가협 어머니들을 접했다. 그 날 이후 민가협 회원으로 가입하고, 다음날부터 안기부 인근에서 민가협 어머니들과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항의시위에 참여하고, 아들 심상득을 면회할 수 있었다. 민가협 가입 직후 활동을 하면서 민가협 어머니 중 임기란 어머니를 잘 기억하고 있다. 아들 심상득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 재판을 받았고, 목포 교도소로 이감되어 목포까지 면회를 다녔다.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구속자가 발생하면 항의하러 가는 등 민가협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던 중 1993년 종로서인지, 시경인지 경찰에게 항의하던 중 꼬리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해 오랜 기간 고생하였다. 1993년 민가협 부회장으로 활동할 당시 회장은 안옥희 어머니였다. 민가협 어머니들과 투쟁을 하던 중 난지도에 버려져 안옥희 어머니와 걸어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하다. 구술자는 1995년에도 민가협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93년 9월부터 시작한 목요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1996년 구속된 아들 심상득이 출소하였지만 구술자는 민가협 활동을 지속하였다. -
김수연어머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로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결혼한 이야기, 자식들 낳은 이야기, 그리고 막내로 한상근열사를 낳았다. 대학입학을 전주에 있는 학교로 가나 싶었는데 용인대에 진학했고 군대를 제대하고서도 아들이 학생운동을 하는 줄은 모르셨다고 한다. 열사가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고 마석 묘지에 열사를 묻고 고 박정기 아버님을 통해 유가협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 후 계속 유가협 활동을 하고 계신다. 그래도 용인대에서 한상근열사를 기억하고 추모해주고 있어서 고맙다는 말씀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건립과정에서 많은 아쉬움이 있다는 얘기, 민가협 어머님들과 투쟁한 얘기, 이어서 같이 듣고 있던 따님도 본인이 느끼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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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균출생과 성장과정, 대학시절의 활동, 대학졸업 이후의 활동, 유가협 활동, 1987년 대통령 선거 무렵의 활동, 유가협이 사회에 끼친 영향과 활동 중 아쉬웠던 점, 민주화보상법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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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김정숙은 1939년 전남 보성군에서 7남매 중 둘째로 출생하여 21살 결혼 전까지 생활했다. 보성에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결혼해서 장흥에서 생활하다가 큰 아들이 4살 때 전남 안양으로 분가했다. 1979년에 가족이 서울 동대문구 묵동으로 상경했다. 1989년 셋째 아들 임종석이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되어 1989년 1월 13일 수배를 당하고 형제들 직장을 비롯해 집 앞에까지 경찰과 안기부 직원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1월 무렵부터 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아들이 수배 중이어서 연세대 등 아들이 다녀가기로 한 대학교에 음식과 옷가지 등을 싸서 손녀를 업고 갔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를 진압하는 상황에 직면해 고생하기도 했다. 아들 임종석은 1989년 12월 18일에 검거되었다. 구술자는 민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전주교도소를 비롯하여 대전교도소 등 구속자를 위한 항의시위에 참여하는 등 민가협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대전교소도에서는 밤을 새우고 다음날 교도소장을 면담하는데 밤새 피워 둔 곤로 그을음에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참여한 일화를 기억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1992년과 1998년 민가협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
19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과 관련하여 공안당국이 대선 정국에 활용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하였고 민가협도 연루되었다. 민가협에 대한 압수수색도 진행되었고, 이 시기동안 수배 상태로 추석 무렵부터 다음해 대선 투표가 시작되는 날까지 대학가를 전전하기도 했다. 구술자는 남규선 총무가 민가협 사무국을 총괄하던 시기 대부분의 활동을 같이 했다. 장기수 석방 투쟁에 참여했고, 북한을 방문해 당시 장기수 선생님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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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욱, 전영희대부분의 부부가 중매로 맺어지던 시절, 두 분은 10년 넘게 알아오면서 연애결혼을 했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속에서 이런 저런 많은 상황을 겪었지만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누구 못지 않게 키워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김성수 열사 역시 여느 모범생처럼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는 착한 아들이었고 누나가 이화여대를 진학한 후 서울대에 진학해서 집안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아들이 대학 생활 시작 얼마 후 부산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떠오른 후 두 분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게 되었다. 아들은 죽음의 원인도 모르는 의문사로 처리되고 이어지는 감시와 사찰 속에서 어떻게든 아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자 서울에서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여의도에 400일이 넘게 진행된 농성에 전영희 어머님이 중점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지난한 싸움이 이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태풍 루사로 인해 집이 송두리째 떠내려가는 어려움 마저 겪게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남은 딸, 아들이 장성해서 손주, 손녀도 열심히 살아서 흐뭇하고 강릉에서 김성수 열사 기념사업회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흐뭇한 마음,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과 맺은 인연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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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강민호열사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구술이 시작되었다. 예전 임신 당시의 태몽에서부터 어머님 고향, 서울로 귀경하게 된 얘기, 어머님의 어린 시절 얘기등을 중심으로 간단한 얘기를 나눈 뒤 어머님이 어린 시절 겪었던 한국현대사의 큰 사건인 여순사건 당시의 얘리를 해주셨다. 어머님은 고령임에도 예전에 있었던 일을 또렸가게 기억하고 계셨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강민호열사의 어린 시절 얘기를 지나고 대학을 들어가서의 일도 하나하나 다 기억하시고 말씀해 주셨다. 아들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알고 계시자 못하다고 건국대 애학투사건으로 강민호열사가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는 알게 되었고 구로구청 개표부정 사건으로 투옥된 일 등 강민호열사의 대학시절 얘기를 잘 말씀해 주셨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대붕전선으로 위장취업한 후 죽음을 맞게 된 강민호열사의 얘기와 이후 유가협 활동을 슬프지만 담담하게 말씀해 주셨다. 올 해 돌아가신 지 30주기를 맞이하는 아들의 얘기와 더불어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작업 중 돌아가신 고 김용균님이 강민호열사의 죽음과 비슷해 가슴이 아프다는 말씀. 그리고 유가협 총무로써 오랜 시간 활동하신 돌아가신 남편 강영철 아버님의 얘기를 해주셨고 이제 남은 가족들 얘기, 그리고 강민호열사가 돌아가시고 많이 도와주고 힘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말씀하시면서 구술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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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기장 여신도회연합회와 김지하씨 사형언도, 구속자 석방운동, 3.1사건, 동일방직사건, 구속자석방기도회, 구속자 면회 및 영치금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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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규선남규선은 1963년 생으로 1980년대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지인의 구속으로 민가협 회원이 되었고, 당시 고문 등을 염려해 사회적 공론화를 시도하던 중 직접 본인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1990년 2월 민가협 상근간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1992년부터 2001년까지 민가협 최장기 총무로 활동하였다. 1989년 시작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비롯해 1992년부터 시작된 양심수 석방캠페인, 1993년 9월 23일 시작된 목요집회를 기획하고 주도했다. 이번 1980년대 가족운동 구술대상자 중 유일하게 2회에 걸쳐 구술을 진행했다.
1차 구술에서는 민가협에 소속된 협의체를 비롯해 민가협의 조직적 성격과 주요 활동 내용에 대해서 구술했다. 구술자가 활동할 당시 민가협은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양심수 후원회, 장기수가족협의회, 청년민주인사가족협의회, 구속노동자가족협의회, 유가족협의회 등 6개의 협의체가 소속되어 있었다. 대부분 협의회마다 간사가 있었지만 점차 민가협 활동이 지속되는 동안 협의회에 간사가 없는 경우가 생겼다. 19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 당시 민가협이 공안당국에 의해 침탈을 당했고, 이 시기민가협 총무로 활동했다. 1989년 시작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은 회원으로 참여했지만 1990년부터는 기획을 도맡아 진행했다. 1996년 연세대 사건 이후 대학가의 공간을 대여할 수 없는 공안정국이 조성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양대에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성사시킨 일화, 매해 섭외 과정 및 행사 과정에서의 일화를 구술해 주었다.
2차 구술에서는 1차 구술에 등장한 민가협 관련 다양한 활동가들의 이름 및 활동 등을 다시 확인하고, 1992년부터 시작된 양심수 석방 캠페인 활동과 1993년 9월부터 시작된 목요집회의 기획 배경, 집회 당시의 일화 등을 구술했다. 1990년 민가협 상근간사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상임의장으로 활동한 어머니들, 주요한 민가협의 투쟁들, 특히 장기수 석방운동과 관련한 일화 등을 구술해주어 민가협사 전반을 연결할 수 있는 내용을 제공해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