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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희

구술자소개

구술자
정선희
면담자
김종길
구술일자
2023.8.27.
장소
정선희 작업실
구술시간
5시간 2분 28초
구술아카이브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문화예술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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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내용 요약

정선희는 1959년 부산 출생. 유년 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후, 부산 이사벨여자고등학교와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나, 대학 시절 학내 문제에 발언하는 대자보(성명서)를 붙이며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을 함.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상 진학이 어려웠음. 4학년 여름방학,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동생의 권유로 서울에서 디자인 아카데미를 수강, 교생실습을 포기하고, 학교 졸업 후 충무로에 있는 기획사에서 직장 일을 시작. 집안의 결혼 강요로 고향 부산에 잠시 내려가 있다가, 20대 후반이 되던 1985년 말 다시 상경함. 당시 서울대학교 재학 중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을 하던 동생의 생활을 지켜보다, 성수동 봉제공장에 취업. 6개월 후 봉제공장을 그만두고, 동생의 소개로 ‘민미협’을 찾아갔다가, ‘우리마당’ 활동을 시작하 됨. ‘우리마당’의 판화교실 선생으로 있던 차일환을 비롯하여, 남규선, 이성강, 오진희, 김원주, 신경숙, 마문호 등을 만나면서, 1980년대 후반 진보적·전위적 민중미술의 가장 실천적 소집단의 면모를 보여준 서울미술운동집단 ‘가는패’(1987년 1월)를 결성. 결성 후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가는패’의 첫 사업으로 박종철 장례 걸개그림을 제작. 이후, 1987년 상계동 철거민 지원을 위한 《‘가는패’ 열림전》을 시작으로, 안성, 광혜원, 장호원, 진천 등을 돌며 《농촌 장터 순회전》을 개최. 한독금속노조 연대 공장벽화 제작, 노동절벽보선전전 기획, 노동자 화실 햇살그림터 개소. 1988년,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위한 걸개그림 <노동자>를 제작·설치. ‘전노협’의 제안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정선희가 제작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 1988년 8월, 민미련 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 이 무렵 차일환 등이 구속되며, 정선희가 이어 ‘가는패’(1990년 이후 ‘서울민미련’으로 변경)의 대표를 맡아 이끌며, 창작단 활동과 교육선전대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천. 범민족대회에 설치한 걸개그림 <통일을 염원하는 여성노동자>(1990) 등의 제작에 참여. 1991년 3월 18일,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구성) 혐의로 구속되어 수감 생활 후 출소함.


- 1959년 부산 출생 

- 대구효성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입학 후 졸업 

- 대학 시절 학내 문제에 발언하는 대자보를 붙이며 처음 사회적 발언을 함

- 대학 졸업 후 충무로 기획사에서 디자인 일 시작 

- 학생운동 하던 동생의 영향으로 성수동 봉제공장 취업 

- 봉제공장 나온 후, ‘민미협’ 소개로 ‘우리마당’ 활동 시작

- ‘우리마당’의 인연으로 1987년 서울미술운동집단 ‘가는패’ 결성 

- ‘가는패’ 첫 사업: 박종철 열사 장례 걸개그림 제작 

- 1987년, 상계동 철거민 지원을 위한 《‘가는패’ 열림전》

- 《농촌 장터 순회전》

- 한독금속노조 연대 공장벽화 제작 

- 노동절 《벽보선전전》 

- 노동자 화실 햇살그림터 개소

- 1988년, ‘전노협’ 제안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를 위한 걸개그림 <노동자> 제작 

- 1988년, ‘민미련 건준위’ 참여. ‘가는패’ 대표 차일환 등 구속

- ‘가는패’에서 ‘서울민미련’으로 확대 개편, ‘서울민미련’ 대표를 맡아 이끔 

-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구성) 혐의로 구속되어 수감 생활 후 출소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23_1980년대 문화예술운동2_구술자료 상세목록_정선희.pdf 88107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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