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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장진영
- 면담자
- 김종길, 양정애
- 구술일자
- 2022.11.30.
- 구술장소
- 서울 종로구
- 구술시간
- 4시간 37분 38초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문화예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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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장진영(예명 장영수)은 1956년 서울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으로, 중앙정보부 지휘관급 요원으로 있던 아버지 직장 근처 우이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3 무렵 아버지가 빚을 지고 도망, 은행에 집이 저당 잡히며 어머니와 형과 함께 야반도주, 청량리역 근처에 단칸방을 얻어 살면서 어머니가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형은 서울대학교 사회 계열로 진학했으나,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보내며 고등학교 입시까지 실패, 방황하던 시절 가출하여, 당시 그렸던 만화그림들을 모아 ‘소년한국일보’사에 찾아갔으나 집으로 돌려보내짐. 재수해서 중경고등학교로 진학, 미술반 활동을 하며 선배 화실에서 독락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76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시절, 추상미술 계열의 작품 활동이 지배적인 학풍 속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부딪혔다. 친형의 추천으로 『창작과 비평』을 접하고, 백낙청의 평론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등을 읽으며 감흥을 받았다. 대학 1학년 시절, 선배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 훗날 두렁 활동을 함께 한 이기연을 만났다. 홍익대학교 연극반 활동 시절, 회장을 맡으며 번역극 금지와 구타 금지를 선언했다가 전통을 와해시킨다는 명목으로 선배들의 구타 속에 제명을 당했다. 대학 3-4학년 시절, 관계하고 있던 교사 연극모임이 남민전사건(간첩단사건)에 연루되며 전원 체포, 회원명부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 수배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연이은 폭력과 억압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경험하였다.
1977년 서울대중앙도서관점거 유신반대시위사건(11·11중앙도서관점거농성)에 참여했던 친형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구속자 가족 총무를 맡아 인권 변호사 섭외, NCC(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와 관계하며 한국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법정에서 친형의 최후 진술-자립 경제, 민주 정치, 노동자 계급의 권리 보장-을 통해 학습, 대학 4학년 시절, 친형을 통해 대한전선노동조합의 신금호 선배(노동운동가, 당시 대한전선노조 전문위원)를 만나 대한전선노조의 선전물 작업(노동자 교육을 위한 만화 슬라이드 작업)을 하며 예술의 역할과 의미를 찾았다.
대학교 3학년 시절, 서울대 운동권의 소개로 김봉준 선배와 첫 만남, 1982년 군 제대 후 재회하며 홍익대 내 스터디 모임에 합류하였다. 1983년, 공개된 반합법 문화적 정치투쟁 공간으로서의 애오개 소극장(애오개 문화공간)이 출범, 서울대 탈반 활동가들과 김봉준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애오개에서 지내며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을 준비하였다. 당시 수배 중이던 김봉준, 결혼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 준비 과정에 있던 이기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노협) 활동과 노동 현장 활동에 치중해 있었던 김주형 등 초기 두렁 회원들의 여건 상, 공개 활동으로 장진영이 총대를 메고 두렁의 대표를 맡아 《미술동인 ‘두렁’ 창립예행전》과 이후 《미술동인 ‘두렁’ 창립전》을 치러 냈다. 창립전 이후 애오개에서 독립하여 장진영이 살던 방을 정리하여 서대문 로터리에 두렁 작업실을 구축하여 활동을 했다. 이 시절, 작업실 밖에는 늘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1985년, 정치적 문화투쟁을 선언한 단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이 창립, 집행부 간사를 맡게 되면서 두렁의 회장직을 김우선에게 넘겼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 시절, 각종 노동단체 회보 및 집회 선전물(선전그림) 등 노동운동 관련 인쇄물, 걸개그림, 깃발, 슬라이드 등을 제작 총괄하였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사건 –경찰에 의한 불법 그림 탈취(압수)- 에 미술동인 두렁이 관계, 미술 탄압에 항의하는 미술계의 목소리가 모아져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가 창립되었다. 1986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이 노선투쟁 –중간계층의 선전 역량 강화 vs. 노동계급의 선전 역량 강화-을 겪으며 와해, 노동계급 강화 이론에 방점을 찍었던 장진영 역시 1986년 조직을 정리하였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을 정리한 이후, 1987년 후배들과 『만화신문』을 제작, 노동운동가 유동우가 대표로 있던 기독노동자총연맹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으나 1여년 발행 후 해체하였다. 이 외 작화공방에서는 『임투를 위한 선전·문화활동 실무사전』, 『이석규 열사전』 등을 출간하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언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문화 지형의 변화를 감지, 저항만화보다 합법적 대중만화의 인기가 높아졌음을 실감하며, 1994년 작화공방의 발전적 해체를 단행하였다.
1994년 이후, 귀농하여 농사 짓는 틈틈이『주간노동자신문』, 『문화일보』, 『한국농어민신문』 등에 만화와 만평을 연재, 연재했던 만화들을 『삽 한 자루 달랑 들고』, 『무논에 개구리 울고』 등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최근에는 민중만화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위해, 1980년대 작업했던 재야단체 기관지에 실린 민중만화들을 묶어 출간하였다. 그 중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 있던 이름 없는 민주투사들에게 바치는 헌정만화 <나선>과 여성 노동자가 선진 노동자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등이 있다.
- 구술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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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서울에서 2남 중 막내로 출생
-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76학번으로 입학 후, 1980년 졸업
- 1977년 서울대중앙도서관점거 유신반대시위사건(11·11중앙도서관점거농성),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친형이 구속되며, 구속자 가족 활동을 시작함
- 1979년 대한전선노조의 선전물 작업 (노동자 교육을 위한 만화 형식의 슬라이드 작업)
- 미술동인 두렁과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 활동을 하며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문화예술운동에 참여
- 1980년대 민중만화 관련 구술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대한전선노동조합 선전물 작업 구술
- 구술상세목록 및 녹취문
- 2022_1980년대 문화예술운동1_구술자료상세목록_장진영.pdf 130801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