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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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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오충일
면담자
이가연
구술일자
(1차) 2023.7.25. (2차) 2023. 7.26.
구술장소
인천
구술시간
7시간 17분 30초

구술컬렉션 > 재야운동 > 지역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40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오충일은 한국전쟁 직전 어머니와 단둘이 월남하여 인천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를 가르치던 사람으로, 해방 직후 사라졌다가 한국 경찰이 되어 나타났다. 그 후 아버지는 한국전쟁에 군으로 참전, 전쟁 중 폐병을 얻어 구술자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사망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인천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명문 중학교에서 입학했으나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중학생 때 우연히 서울을 방문한 구술자는 이후 상경을 결심하고 인천 생활을 접고 최초 청량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이후 청계천으로 이주해 노점상을 하였다. 노점을 하면서 우연히 교회를 나가게 되고 신앙의 길로 접어들었다. 집안 형편이 녹록치 않았지만,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20대 초반에는 농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경기도 이천의 감리교 산하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나름의 농촌운동에 힘썼다. 20살이 되던 1960년, 4월 혁명 때는 개인적으로 참가하였는데, 광화문 사거리에서 시위대들을 위해 수신호수 역할을 했다. 이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진학해 한태동 박사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70년대 초반 연세대 위수령 상황에서 김찬국 교수의 당당한 행동에 감동을 받고 학교를 장악한 군대의 모습을 보며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기로 했다. 70년대 초부터 NCC실행위원을 시작으로 NCC인권위원회, 목요기도회 등을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민중과 신학의 관계와 현장성에 관해 고민했다. 조용술 목사의 설교 ‘표리부동’을 배포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되어 9개월간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후 도시산업선교회 등에서도 활동하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때 NCC차원에서 진상조사를 실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광주를 2차례 방문하고 NCC에 보고했으나, 당시 이 의견은 묵살되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국본 조직 및 6‧10항쟁을 이끌었으나, 항쟁 직후 체포되어 한 달 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90년대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90년대부터는 목회활동에 집중하기도 했다. 《노동일보》사장을 역임하였고, 2004년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인혁당재건위사건 등 국정원에 의한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진두지휘했다. 그 후 정계에 투신하여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창당 및 대표가 되었다.

구술내용 요약

- 출생과 성장과정, 집안내력

- 일제 말기와 해방의 경험, 부모님에 관하여 

- 월남 시기 및 월남의 경위

- 학력사항, 중고교 시절과 가난에 대한 기억

- 노점상을 하게 된 경위, 노점 당시 청계천의 모습

- 교회에 나간 이유와 교회에서의 활동, 진로에 대한 고민과 신앙생활, 대학 진학 

- 구술자가 경험한 4월 혁명, ROTC를 지원한 동기

- 연세대에서 경험한 위수령

-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으로의 진학, 농촌 목회활동 

- 유신헌법에 대한 생각

- NCC에서의 활동 및 박형규 목사와의 관계 

- 긴급조치 9호 위반에 관해

- 1970년대의 전반적인 사회 경제 상황,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 1980년 서울의 봄과 5‧18민주화운동의 경험 

- 1984년 NCC광주진상조사위원회 활동

- 6월항쟁 때 국본 상임집행위원장으로의 활약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희장 활동

- 2004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의 경험 

- 민주당 창당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1987년 6월항쟁이 시작되기 전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대식과 상임대표로의 선출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