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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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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신언관
면담자
정호기
구술일자
2021.8.8.
구술장소
충북 청주시 구술자 자택
구술시간
225분

구술컬렉션 > 농민운동 > 80년대 농민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55.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

1975.  3.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교육과 입학

1978.  6.  1.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민주구국선언문」 배포 시위사건으로 유죄판결(징역, 자격정지 2년)

1980.  5.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수도군단에서 재판을 받고 수감

1982. 석방 후 귀향하여 청주시에 사회과학서적 서점 운영 

1983. 농업에 종사

1984. 충북기독교농민회 총무

1985.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중앙상임위원, 홍보위원회 위원

1987. 청원군농민협회

1988. 전국농민협회 사무처장. 충북농민연합 회장(1988. 3. 20. 창립)

1988.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총무

1989.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집행위원

1990.  4. 전국농민회총연맹 제1대 집행부 정책실장(「창립선언문」 작성) 

1991.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충북연합 회장 

한국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연합회 생명농업실천위원회 위원장

구술내용 요약

신언관은 1955년  충북 청원군 현 자택에서 출생했다. 신언관의 선조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으며, 중농 이상이었다. 학업에 재능이 있어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공부했고, 1975년 3월 서울대학교 농업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진학한 해에 김상진할복사건이 발생했다. 신언관은 사건 현장 바로 옆에 있었다. 이 일은 인생의 행로를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학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로 인해 1978년 6월 민주구국선언문을 제작 배포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제적되었고, 1980년에도 유죄판결과 제적 처분을 받았다. 대구교도소와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80년 후반에 석방된 후, 노동운동을 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농민운동으로 전환했다. 청주로 돌아와 ‘정우사’라는 사회과학 서점을 운영했다. 이 서점은 청주지역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2년 서점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농업에 전념했다. 농민운동을 위해서는 농사를 짓는 방법과 정서를 습득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지역의 농민운동가였던 최종진을 만나 충북기독교농민회 총무직을 권유받았고,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농민운동에 합류했다. 청주지역은 기독교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가 연대하여 활동했던 기억은 없다. 기독교농민회의 종교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87년에 청원군농민협회를 설립하고 제2대 회장이 되었다. 얼마 후인 1987년 2월 28일에 전국농민협회가 결성되었다. 신언관은 충북농민협회 회장, 전국농민단체협의회 총무로도 활동했다. 충북지역의 다양한 농민운동의 흐름은 전국농민회총연맹 결성으로 합류했다.

신언관은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할 때, 「창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제1대 정책실장을 맡았는데, 농민운동의 조직 활동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991년 11월 정치인으로 전환했다. 그렇지만 농민운동의 끈을 놓치는 않았다. 현재는 한국가톨릭농민회 청주교구연합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생협운동이 주된 활동 영역이다. 농민운동은 대중운동으로서 위상을 지녀야 했으나, 당 조직으로 변모한 이후에는 지지기반을 상실해갔다. 농민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의 열정과 통합농민운동 조직 결성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1980년대 농민운동의 주요 쟁점,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선언문 작성 배경, 1980년대 농민운동의 특성과 성격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