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컬렉션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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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자
고송자는 1949년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다. 4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책임감 강하게 자랐다. 가난한 집안의 가세를 일군 할머니의 가르침과 영향이 컸다. 1974년 중매결혼을 해서 무안군으로 이주했다. 고향에서는 농사를 크게 짓지 않았기 때문에 떼밭을 갈아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다. 무엇보다 수확한 농작물의 제값을 받지 못하고, 수매상의 횡포에 시달리는 것이 괴로웠다.
1980년 중반까지 농사를 지었지만, 농민운동이나 농민대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동네 주민이었던 대학생 박진우가 농민교육에 참석해보길 권했고, 그를 따라 해남교회에 가서 처음 교육을 받았다. 1987년 마을‧양파투쟁을 할 때, 농민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농민운동가들을 보며 농민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1988년 고추의 과잉 생산으로 고추값이 떨어지고, 정부의 전량 수매가 이뤄지지 않아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농협에서는 일부 주민들의 고추만 몰래 수매해서 주민들의 공분을 샀다. 수양촌 부녀회원들에게 불만만 하지 말고 직접 가서 따져보자 하자 다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경농협 앞에서 수양촌 부녀회원들의 집회가 있고 3일 후에 농협으로부터 전량 수매 약속을 받아냈다. 정부의 수매 분량 22톤 중에서 무안군에 12톤이 배정되었는데, 수양촌에 9톤을 수매하기로 결정됐다. 고추싸움이 성공을 거두자 부녀회원들은 용기가 나서 나머지 고추수매를 위해 다시 한 번 집회를 열기로 한다. 12월 5일 경운기에 고추를 싣고 정부의 전량수매를 요구하며 무안군청으로 향했다. 무안군청 앞마당에 고추를 쌓아놓고 시위를 하다가, 눈비를 피해 고추 포대를 군청 안으로 옮기며 점거농성을 하게 됐다. 3〜4일 후, 무안군청이 고추 전량 수매를 약속했다. 수양촌 고추싸움이 성공을 거두자 주변 지역 고추를 수매하기 위한 2차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백골단이 투입되어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2차 고추싸움까지 전량 수매라는 결과를 받아내었고, 수양촌의 고추싸움을 시작으로 고추싸움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고추싸움 이후 무안군여성농민회 조직 논의가 확산되었다. 현경면여성농민회를 먼저 결성하고, 운남면과 현경면 여성회원들을 포함하여 무안군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80년대 후반 무안군 여성농민회는 수세폐지운동, TV시청료 거부운동, 의료보험투쟁 등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92년 무안군여성농민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1994〜1995년 전국여성농민회 전남연합 회장을 맡았다. 1997〜2000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현장 여성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노력했다. 전여농 회장직을 마치고 다시 무안으로 내려와 우리농산물지키기 광주전남운동본부, 수양리 부녀회, 전라남도의원, 여성농업인센터에서 활동하면서 농촌과 여성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농민들에게 농민운동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할 수 있을 때까지 전력을 다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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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혁
권오혁은 1955년 경북 청송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회사에서 일했으나, 젊은 시절에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가 5남매를 양육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구술자도 현서면의 화목교회를 다녔다. 이로부터 교회를 기반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전국청년연합 경안노회 회장 겸 농촌분과 회장을 맡았다. 농촌선교에 관심을 갖다보니 김영원과 김성순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화목교회를 중심으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청송신용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영원과 김성순의 소개로 1978년 4월 크리스찬아카데미 제1차 교육 18기를 이수했으며, 2차 교육도 받았다. 이는 농민운동에 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오덕의 지원을 받아 마을문고운동도 했다. ‘7총무’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작은 마을 일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1979년 말에 제2국민역으로 군복무를 시작했고, 1981년 2월에 병역을 마쳤다. 농활과 관련하여 서강대 학생 김의기와 교류했다. 1980년 5월 30일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약속한 6월 6일 EYC에 갔다. 그 일대가 경찰에 봉쇄되어 있었다.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누군가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인물을 받게 되었다. 이 유인물을 보관하다가 병역을 마치기 직전에 부산에서 개최된 기독교 행사에 배포하기 위해 소지하고 이동하다 동대구역에서 발각되어 고초를 치렀다.
기독교농민회의 결성 준비 소식은 기독교 네트웍을 통해 알고 있었다. 경북에서도 1980년부터 기독교농민회의 결성에 착수했고, 1982년 3월 19일에 창립했다. 영주, 봉화, 안동, 청송, 김천, 의성, 달성 등지를 다니면서 참여자를 모으고 조직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경찰과 정보 당국의 감시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1982년 3월 18일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의 결성 준비 과정에는 간사로 참여했다. 1984년 초까지 경북기독교농민회 총무를 역임했다. 경북기독교농민회는 1980년대 중반까지 사실상 안정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구술자가 총무로 활동할 때는 11개 지역에서 50∼60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역량이 충분하지 않아 독립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지 못했다. 경북기독교농민회가 발간한 소식지는 학생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투신한 김종길이 발간한 것이다. 김종길이 경북기독교농민회의 2대 총무였고, 3대 총무는 배윤호였다. 사회운동으로는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 집행위원과 총무로 활동했다.
1983년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치중했다. 1984년에는 YMCA를 매개로 양곡조합을 주관했다. 신용협동조합 경북 사무국장 윤종대의 권유로 교도원이 되었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하여 1988년에 신용협동조합 중앙회에 특채되었고, 15년간 농촌개발부에서 근무했다. 비록 이 기간에는 농민운동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환경운동과 생명운동, 먹거리운동, 직거래 등을 통해 농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현재도 기독교의 인연은 지속되고 있으며, 50대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장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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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대성장배경, 가톨릭농민회 초기 활동, 민중교육방법론, 소몰이 시위 평가, 2.13여의도농민항쟁과 전국농민운동연합 결성, 전농 창립과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창립과 상임의장 활동, 전략지도중심, 운동이론 체계화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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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1970년대 정치경제 및 사회적 배경, 학생 농촌활동, 전남기독교농민회 창립준비 배경, 기독교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 학생운동 그룹들 관련, 농민협회, 농촌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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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중출생 및 성장기, 부산 피난 시절, 청년공동체수립안, 고려대 편입과 협진회 활동, 농업문제연구와 써클 활동, 한국농업문제연구회 활동, 신조회·신진회·협진회 활동, 4월혁명 시기의 통일운동,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주민족청년동맹,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근무, 민우지사건과 투옥, 민족통일촉진회 활동, 평화통일연구회 활동, 민중당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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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일제시대 생활,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 함평고구마사건 참여, 마을활동, 1980년대 경북지역 농민운동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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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김성순은 1929년 경북 김천면에서 출생했다. 출생한 이후 1970년대 활동에 관한 개괄적인 사항은 2010년 9월 2일에 이루어진 구술채록에서 정리한 바 있다. 1960년 3월 12일부터 포도농사를 시작했고, 1970년 초 현재의 장소로 이사해 포도농사를 지었다. 유달영이 재건국민운동본부 회장에 재임하던 시기에 인연을 맺고 영향을 받아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재건학교 운영과 새마을금고의 설립이었다. 재건학교는 2년간 운영되었고, 김천새마을금고는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포도재배기술을 어렵게 습득했으며, 일본에서 품종을 어렵사리 도입해 한국에 확산시켰다. 포도재배기술을 배우러 온 한 젊은이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했다.함석헌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강정규, 최완택, 이현주의 인연으로 1976년에 크리스찬아카데미 제1차교육 9기로 이수했다. 이 교육을 받은 후, 한국가톨릭농민회 한마음분회를 결성했다. 한마음분회는 안동교구의 영향과 지원을 받았다. 1978년에는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북 총무여서 함평고구마사건 단식농성에 참여했다. 8일간의 단식농성을 마치고 해단식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작성했다. 1979년 오원춘사건으로 8월 15일 2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정농회와의 인연은 1980년대 초에 오재길을 통해 형성되었다. 정농회와의 인연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중단되었다. 최종진의 권유를 받고 가톨릭농민회에서 기독교농민회로 활동 영역을 전환했다.을류농지세 투쟁은 포도농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농협민주화는 군사정권의 유산을 극복하는 일이었는데, 난관이었다. 당국은 농민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면에서도 주시했고, 다니던 교회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987년에는 경북기독교농민회 회장을 하는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현재는 구체적인 활동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가톨릭농민회는 중심을 갖고 유지되었던 반면, 기독교농민회는 해산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1988년에는 전국농민단체협의회 회장도 역임했으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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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오인적사항 및 신학교시위, 민통련과 사제단, 목동회, 1986년~1989년 운동의 경험, 우리밀 구명, 운동세력의 정치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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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순
김정순은 1951년 9월 14일(음력)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연마을에서 출생했다. 안산 김씨 집성촌 마을이었으며, 주로 쌀농사를 지었다. 도암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도암면에서 자취했고, 광주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3 말에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기계 오일 냄새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 진학을 위해 광주에서 공부하다 그만두고 1972년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 제대 이후, 신평교회를 다니던 후배 김규식, 윤재경의 권유로 1975년 말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고 청년회 활동을 했다.
윤기현의 소개로 1977년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이수했다. 1차 교육 15기로 성북구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근처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농민 문제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농민운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교육원 모임에서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 조직화 문제가 구체화되었고, 전남기독교농민회 결성 준비를 위한 모임이 이뤄졌다. 김정순은 나상기의 권유로 전남기독교농민회 준비위원회부터 서기로 활동했다. 1978년 3월 8〜9일 전남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전남기독교농민회는 각 지역의 기독교농민회 결성을 위한 교육과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1980년 5월 2일 전북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고, 1981년 2월 15일 충북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다. 전북지역은 4-H 활동을 했던 임수진이 중심적으로 활동했으며, 충북은 덕촌교회를 중심으로 주요 활동가들의 참여가 이뤄졌다. 기독교농민회 조직화에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의 논의가 초석이 되었고, 학생운동 출신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배종렬, 정광훈, 최종진 등 농민운동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원이 더해져 1982년 3월 18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이 결성하게 된다. 이때도 김정순은 준비위원회부터 서기를 맡아 참여했다. 1982년 강진군기독교농민회가 창립되었고, 김정순은 회장을 역임한다.
1983년부터 함평군, 고창군, 임실군, 서천군 등 군 단위 지역별로 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으며, 김정순은 강진군, 전라남도, 전국 모임에 참여했다. 1984년 9월 2일 함평‧무안농민대회는 기독교농민회 역량이 총결집되고, 함평의 노금노, 무안의 배종렬, 김홍재 등의 인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85년 미국농축산물수입요구 규탄대회와 미국대사관 진입사건이 있었다. 김정순은 기독교농민회 과제실천분과위원장으로 대책회의를 진행했고, 4월 23일 미국대사관 진입 작전을 세우게 된다.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출근 시간에 맞춰 기습적인 진입을 시도했고, 플랜카드를 펼치고 농민가를 부르며 시위를 진행했다. 이 사건으로 20〜30명이 종로서로 연행되었다. 1986〜1987년 전남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7년부터 일반 농민대중을 대상으로 단일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졌고, 1988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이 이뤄지면서 10월 31일 전국농민단체협의회가 결성되었고, 1989년 3월 1일 대전 가농회관에서 전국농민단체연합이 결성되어 통합을 위한 활동이 이뤄진다. 1990년 4월 24일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되었고, 5월 1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라남도연맹이 결성되었다. 각 군 단위별로 지역적 차이나 특징이 있었지만, 농민대중 조직으로 나가야 한다는 공유된 논의가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1991년부터 전남도연맹 정책실장을 역임하며 정책실의 사업계획, 교육정책, 일정 등을 세워 활동했다. 1994년에는 다시 강진군으로 내려와 군 농민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으나 1997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농민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혁명을 꿈꾸며 농민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김정순에게 농민운동은 삶의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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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숙1960년대 농촌활동, 한국여성학 연구의 시작배경, 1970년대 여성조직의 활동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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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출생 및 해방공간, 한국전쟁과 1950년대, 대학입학 및 군대생활, 야학운동, 한국가톨릭농민회 결성 및 농민의식화 교육, 가톨릭여성농민회, 농촌탁아소운동으로서 어린이집 운영, 신구전문대학 강의, 전국화훼협회 결성, 1980년대 농촌 조직활동 및 성남지역활동, 1980년대 농민운동, 민중의당 활동,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사건, 통일운동 참여 활동, 성남 빈민운동, 농촌운동과 4H운동,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활동, 정당, 정치운동과의 유기적 활동, 노동자 농민의 정치세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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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재김홍재는 1939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에서 출생했다. 형이 2명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사망했고, 누나도 사망했다. 그래서 호적상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는 1943년 9월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김홍재는 해방이 되고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에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시기 서울수복 즈음에 인공 가담자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1955년에 전남 광주시에서 직공으로 일했고, 1956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했다. 목포 성경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1961년에 졸업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강원도 양구에서 포병으로 군복무를 했으며, 1962년에 결혼했다. 전역 후 현재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 재배 작물은 벼, 보리, 고구마, 유채였으며, 특용작물은 토질이 나빠 재배하지 않았다. 1968년부터 몽탄면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71년에 새마을지도자로 선정되었다. 1974년에는 대통령특별사업 예산도 받았으며, 1976년에는 민방위교육 교관을 지냈다.
김홍재는 나름의 방식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다 배종렬의 소개로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전남기독교농민회 결성에 동참했다.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전남기독교농민회 감사와 총무를 역임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농민회를 결성하기 위해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1982년 3월 18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봤다. 당시에는 종교색을 갖지 않으면,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1984년 함평·무안지역현안문제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했고, 1988년 무안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지냈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면서 재편된 한국기독교농민회에서 부회장 2회를 비롯해 회장, 감사 등을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