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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재
사업개요
- 1980년대 농민운동 1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3~4차년도(2021~2022) 과제인 '1980년대 농민운동' 구술 채록은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운동의 기억을 복원하고 문헌에 누락된 현장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1차 채록은 기독교농민운동 관련 인사 3인(김홍재, 박용래, 이봉구)을 구술자로 선정하여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참여 과정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활동상을 포괄했다. 특히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출범을 농민운동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상정하여, 이전 시기에 발생한 다양한 쟁점과 사건도 재조명 하였다. 본 사업은 농민운동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점유하는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규명하고,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1차 사료를 구축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김홍재
- 면담자
- 정호기, 김경자
- 구술일자
- 2020.8.18.
- 구술장소
- 전남 무안군 구술자 자택
- 구술시간
- 135분
구술컬렉션 > 농민운동 > 80년대 농민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39. 전남 무안군 출생
1955. 전남 광주시에서 직공(노동자)
1956. 전남 무안군 몽탄면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농업에 종사
1961. ∼ 1964. 군 복무, 결혼
1971. 새마을운동 지도자 선정
1978. 12. 전국기독교농민회준비위원회 참여
1980. ∼ 1984. 전남기독교농민회 감사, 총무
1982. 03. 18.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 중앙상임위원, 이후 연임
1984. 09. 함평·무안지역현안문제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1988. 04. 07. 무안기독교농민회 회장
1990. 02. 15. 한국기독교농민회 출범. 부회장(2회), 회장, 감사
- 구술내용 요약
-
김홍재는 1939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에서 출생했다. 형이 2명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사망했고, 누나도 사망했다. 그래서 호적상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는 1943년 9월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김홍재는 해방이 되고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초등학교 5학년에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시기 서울수복 즈음에 인공 가담자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1955년에 전남 광주시에서 직공으로 일했고, 1956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했다. 목포 성경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1961년에 졸업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강원도 양구에서 포병으로 군복무를 했으며, 1962년에 결혼했다. 전역 후 현재까지 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 재배 작물은 벼, 보리, 고구마, 유채였으며, 특용작물은 토질이 나빠 재배하지 않았다. 1968년부터 몽탄면사무소에서 2년간 근무했다. 1971년에 새마을지도자로 선정되었다. 1974년에는 대통령특별사업 예산도 받았으며, 1976년에는 민방위교육 교관을 지냈다.
김홍재는 나름의 방식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다 배종렬의 소개로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78년 3월 전남기독교농민회 결성에 동참했다.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전남기독교농민회 감사와 총무를 역임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농민회를 결성하기 위해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1982년 3월 18일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봤다. 당시에는 종교색을 갖지 않으면,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1984년 함평·무안지역현안문제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했고, 1988년 무안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지냈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하면서 재편된 한국기독교농민회에서 부회장 2회를 비롯해 회장, 감사 등을 맡았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를 조직하는 과정, 종교적 성격의 농민회를 결성한 이유, 폭행에 의한 무안 농민 김길호 사망사건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