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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혁
사업개요
- 1980년대 농민운동 2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4차년도 과제인 '1980년대 농민운동' 구술 채록은 2003년, 2004년, 2010년에 진행된 기존 농민운동 관련 채록 성과를 보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구술 범위는 1980년대 농민운동의 환경, 주요 쟁점, 조직 구조, 교육 및 단체 운영 등을 중심으로 하되, 구술자의 생애적 특성에 따라 1970년대와 1990년대의 활동까지 포괄하여 기록했다. 이번 사업은 상대적으로 기록 정리가 미흡했던 기독교농민운동, 여성농민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에서 전환된 농민운동의 양상을 재조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농민운동이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점유하는 위상과 영향을 다각도로 규명하고, 그 역사적 가치를 현재적·미래적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 1차 사료를 확보하고자 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권오혁
- 면담자
- 정호기, 이명진
- 구술일자
- 2021.6.28.
- 구술장소
- 경북 김천시 덕천포도원
- 구술시간
- 122분
구술컬렉션 > 농민운동 > 80년대 농민운동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55 경북 청송군에서 출생
1986-1994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졸업
1995-1998 영남대학교 환경대학원 이학석사
1981.3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경북준비위원회 출범, 간사
1982.3.19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경북기독교농민회 결성. 총무(1984년까지)
1982-1984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중앙상임위원
1983- 농촌신용협동조합운동
1987.5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 집행위원, 총무
화목신용협동조합 상무
1988-2003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근무
㈜한국문화진흥원 전무이사
2006 제4회 전국도시지방선거 열리우리당 대구광역시의회 달서2 출마
대구경북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
- 구술내용 요약
-
권오혁은 1955년 경북 청송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운영하던 회사에서 일했으나, 젊은 시절에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가 5남매를 양육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구술자도 현서면의 화목교회를 다녔다. 이로부터 교회를 기반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전국청년연합 경안노회 회장 겸 농촌분과 회장을 맡았다. 농촌선교에 관심을 갖다보니 김영원과 김성순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화목교회를 중심으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청송신용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영원과 김성순의 소개로 1978년 4월 크리스찬아카데미 제1차 교육 18기를 이수했으며, 2차 교육도 받았다. 이는 농민운동에 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오덕의 지원을 받아 마을문고운동도 했다. ‘7총무’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작은 마을 일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1979년 말에 제2국민역으로 군복무를 시작했고, 1981년 2월에 병역을 마쳤다. 농활과 관련하여 서강대 학생 김의기와 교류했다. 1980년 5월 30일 그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약속한 6월 6일 EYC에 갔다. 그 일대가 경찰에 봉쇄되어 있었다.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누군가로부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인물을 받게 되었다. 이 유인물을 보관하다가 병역을 마치기 직전에 부산에서 개최된 기독교 행사에 배포하기 위해 소지하고 이동하다 동대구역에서 발각되어 고초를 치렀다.
기독교농민회의 결성 준비 소식은 기독교 네트웍을 통해 알고 있었다. 경북에서도 1980년부터 기독교농민회의 결성에 착수했고, 1982년 3월 19일에 창립했다. 영주, 봉화, 안동, 청송, 김천, 의성, 달성 등지를 다니면서 참여자를 모으고 조직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경찰과 정보 당국의 감시가 상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1982년 3월 18일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의 결성 준비 과정에는 간사로 참여했다. 1984년 초까지 경북기독교농민회 총무를 역임했다. 경북기독교농민회는 1980년대 중반까지 사실상 안정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구술자가 총무로 활동할 때는 11개 지역에서 50∼60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역량이 충분하지 않아 독립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지 못했다. 경북기독교농민회가 발간한 소식지는 학생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투신한 김종길이 발간한 것이다. 김종길이 경북기독교농민회의 2대 총무였고, 3대 총무는 배윤호였다. 사회운동으로는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대구경북 집행위원과 총무로 활동했다.
1983년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치중했다. 1984년에는 YMCA를 매개로 양곡조합을 주관했다. 신용협동조합 경북 사무국장 윤종대의 권유로 교도원이 되었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하여 1988년에 신용협동조합 중앙회에 특채되었고, 15년간 농촌개발부에서 근무했다. 비록 이 기간에는 농민운동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환경운동과 생명운동, 먹거리운동, 직거래 등을 통해 농촌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했다. 현재도 기독교의 인연은 지속되고 있으며, 50대 이후에는 정치인으로 장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농민운동의 모범 사례와 활동의 어려움, 경북기독교농민회의 지역 기반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