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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사업개요
- 강제징집 녹화사업
-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 수집 사업’ 3차년도 과제인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구술 채록은 해당 사건과 관련해 기 생산된 자료 및 연구 성과의 사실관계를 재규명하고, 보다 완전한 역사 자료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추진위원회’ 및 각 대학 민주동문회와 협의하여 대학·지역·유형별 사례를 고려한 구술 대상을 선정했다. 구술 채록에는 서울시립대, 연세대, 전남대, 한국외대, 경희대, 동국대, 서울대, 성균관대, 경북대, 고려대, 대구대 등 전국 주요 대학의 사례를 포괄했다. 본 사업은 1980년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구체적인 실행 체계와 세부 피해 사례를 파악하고 당시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실상을 실증적으로 기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이준호
- 면담자
- 이영재, 정호기
- 구술일자
- 2020.7.10.
- 구술장소
- 민주인권기념관 회의실
- 구술시간
- 129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강제징집 녹화사업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2. 경남 사천에서 출생
1980-86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학사
1982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자연대 학생장
1982.11.24.-1985.2.14 무기정학 후 강제징집 (6사단 27포대) 및 녹화사업
1987-89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석사
1989-94 미국 caltech 박사
1994-95 UC Berkeley 박사후연구원
1995-2004 연세대학교 생물학과 조교수, 부교수
2004-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부교수, 교수
2016-17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2018.6-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장
- 구술내용 요약
-
이준호는 1962년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출생했고, 1980년 3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다. 형들이 민주화운동에 관계를 맺었으나, 특별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선배들이 회원으로 있던 써클 휴머니스트에 가입해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5월에 문부대에서 병영집체교육을 받았고, 귀교하여 바로 서울역 집회에 갔다. 5월 18일 새벽 4시경, 기숙사에서 자다가 계엄군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쫓겨났다.
휴교령 해제 후, 학교 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휴머니스트 활동은 운영 방식에 대한 입장 차이로 2학년 때부터 소원했다. 학도호국단 학생장이었던 배명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 학생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대체복무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6사단에서 전방입소교육을 받았는데, 결국 강제징집되어 이 부대에서 근무했다. 1982년 자연대 학생장으로 선임된 송태수가 총부학생장이 되면서 이어받았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학교가 보내준 유럽연수에서 이후 활동을 논의했고,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학과장이 11월에 호출하여 학사징계와 입영을 선택하게 했다. 학사징계를 받겠다고 했는데, 무기정학 처분을 하고, 지도휴학 처리를 해서 강제징집되었다. 101보충대를 걸쳐, 6사단 신병훈련소에서 교육을 받고, 27포대에 배치되었다. 신병훈련소에서는 별다른 조사를 받지 않았으나, 자대 배치 후 일정 시점에 보안대를 다녀오고, 상급 보안대에서 8∼9일 동안 조사를 겸한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보안대에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자대에서도 감시와 관리를 받았는데, 포대장이 보안대에 유선 보고하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 1983년 12월경 서울 진양상가(보안대)에 호출되어 이른바 ‘짭새 휴가’를 받았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자 복귀시켰다.
다른 강제징집자들과 달리 민통선 내에서도 근무했다. 편지는 일체 쓰지 않았다. 보안대 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부대원들로부터 간섭받지 않았다. 전역 후 복학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유학했다. 강제징집 트라우마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강제징집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는 있으나,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강제징집 후 짭새휴가(녹화사업)를 다녀온 사연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