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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정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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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정화용
면담자
이영재, 정호기
구술일자
2020.7.25.
구술장소
4.9통일평화재단 사무실
구술시간
191분

구술컬렉션 >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강제징집 녹화사업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80. 서울 배문고등학교 졸업

1981. 서울 성균관대학교 입학

1982. 교내 서클 가입 활동 시작(농우회)

1983.3 군 강제징집

1984. 1.10 과천 보안대 분실 압송 후 진술서/녹화사업/프락치 강요

허위 프락치 활동 발각으로 고문 및 치료(청와대 앞 국군병원)

1985. 30개월 만기 제대 

1986. 군포 지역 노동운동 시작 /약 6개월 후 고문 시 후유증(무릅)으로 노동운동 중지

1987. 사회운동 일환으로 ‘부동산뱅크’ 창업

이후 사업 지속.

구술내용 요약

정화용은 1961년 서울 서대문구에서 출생했다. 부모님은 모두 월남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부산의 고아원에서 생활했으며, 입학 직전에 서울로 올라와 부모의 얼굴을 봤다. 학교생활은 성실한 편은 아니었으나, 1979년 3학년에 서울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다 폐결핵을 앓았다. 이로 인해 재수하여 1981년 성균관대학교 낙농학과에 입학했다. 

1981년 2학기부터 농우회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82년 자연과학대 캠퍼스가 이전하면서 이후의 생활은 주로 수원에서 이루어졌다. 기질상 학생운동 선배들과 운동 방식 등에 대해 마찰을 빚기도 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여러 사건들이 있었으나, 1982년 11월 학생의 날 시위가 가장 충격이 컸다. 이 일로 연행된 학생들이 많았고, 파장은 강제징집으로 이어졌다. 1982년에 농과대학 부학생장이었던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3월 30일 집에서 자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학교 보직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구속과 입영을 선택하게 했다. 연행된 82학번 후배 2명의 석방을 조건으로 입영했다. 1983년 3월 31일 101보충대를 걸쳐 28사단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강제징집자들 십여 명이 함께 훈련을 받았다. 28사단 82연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군대 생활은 성격상 녹록하지 않았으나, 중대원들에게는 나름 인기가 있었고, 사격 능력이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84년 1월 녹화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어 사단 보안대를 걸쳐 1월 10일 경기도 과천 보안대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폭력을 동반한 조사를 7박 8일 동안 받았다. 이후 서울 진양상가로 이첩되어 프락치 공작 압박을 받았다.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 탄로나 폭행을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군대에서의 치료는 형식적이었고, 이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1월 말경 자대로 돌아와 1985년 6월경 전역했다. 이 과정에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전역 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갔으나, 상이 후유증이 악화되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이 창업한 부동산 뱅크에서 일하다가, 독립해 사업체를 운영했는데, 결국은 망했다. 1,200명이나 되는 청년들을 프락치로 활용하려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진상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그동안 녹화사업을 당했다는 것은 거의 밝히지 않았으나, 정말 힘들었고, 자괴감이 컸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보안대 조사 중 구타를 당한 경험과 기억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