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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표
사업개요
- 유신 이전 시기 학생운동
-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번 구술 채록은 1970년부터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전까지 전개된 주요 민주화운동을 기록했다. 과제 범위는 유신 이전 시기의 학생·노동운동, 원주 부정부패 규탄대회 및 지역운동, ‘오적’ 필화사건을 포괄한다.
(유신 이전 시기 학생운동) 1970년대 초반은 산업화 과정의 모순과 독재의 폐해가 표면화되며 전태일 분신, 와우아파트 붕괴, 광주대단지 사건 등 사회적 격변이 잇따른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응해 교련 교육을 강화하며 학원 통제를 시도했으나, 학생들은 1971년 3선 저지와 학원 병영화 반대 투쟁으로 저항했다. 정권은 그해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학생운동 지도부와 주요 활동가 200여 명을 강제징집하는 조치를 단행했으며, 본 채록은 이러한 탄압과 저항의 역동적인 과정을 당사자의 증언을 통해 실증적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유영표
- 면담자
- 신동호
- 구술일자
- 2019. 10. 14
- 구술장소
- 현대사기록연구원
- 구술시간
- 173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서울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8.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고고인류학과 입학
1970.03~1971.02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지 《형성》 편집장
1980.10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인류학과 졸업
2002.01~2003.12 71동지회 회장
2005.02~2009.02 참여연대 운영위원
2005.04~2008.03 (사)민주화운동공제회 이사, 운영위원장
2008.06~2011.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부이사장
2011.03~ (사)민주화운동공제회 이사장
2015.07~ 양평경제정의실천연합 공동대표
2018.07~ (사)민주인권평화를실천하는긴급조치사람들 회장
- 구술내용 요약
-
아버지가 6.25 때 인공 치하에서 부역한 것이 뒤늦게 문제가 되어 억울하게 구속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이런 집안 배경이 학생운동에 나서는 것을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울대 문리대 고고인류학과를 택한 것은 인문사회과학을 좋아하고 희소가치가 있는 학문 분야라는 생각에서였다. 학생운동과는 《형성》 편집위원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68학번부터 실시된 교양과정부는 신입생을 선배 학생운동권과 격리시킨 점도 있지만 단과대별로 흩어져 있던 서울대 학생운동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도 했다. 특히 고령에다 정치사회적 네트워크까지 갖춘 신입생이 대거 들어온 69학번은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이라는 막강한 이념서클을 구축, 1971년 문리대·법대·상대 학생회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문우회는 이런 상황에서 1970년 봄 파편화되어 있던 문리대 운동세력을 하나로 묶은 것이었다.
이런 두 그룹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협력 속에서 1971년 문리대 교련반대투쟁은 시작되었다. 선배그룹은 고학년이 되면 후선으로 물러앉는 풍토를 깨고 4학년 1학기까지는 현장에서 뛰기로 결의를 한 상태였다. 그래서 교련반대데모 중이던 4월 초 학생회에 갔는데, 마침 현장 채증을 하던 사복형사를 학생회 간부가 붙잡아온 일이 벌어졌다. 동대문경찰서 정보과장이던 그는 나를 2선 지휘부로 보았고, 그 때문에 그 뒤 수배, 제적, 강제징집당하는 등 학생운동 중심인물로 취급되었다. 비록 집안 배경 때문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 배후로 오인돼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많은 수난과 고통을 안겨준 결과가 되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동대문서 정보과장 억류 비화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