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이광택

  • 공유하기

사업개요

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광택
면담자
신동호
구술일자
2019. 8. 6
구술장소
국민대학교 북악관
구술시간
160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서울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1975-1976 한국일보(The Korea Times) 기자

1976-1977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간사

1991.10.- 경실련 노동위원장, 조직위원장, 윤리위원장, (사)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4차산업혁명 시민포럼 좌장

1994-2014 국민대 법과대 법학부 사회법전공 교수

1997.01.- 참여연대 노동관계위원장

1998.10.- 최종길교수 고문치사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

2002.03.- 국가인권위원회 조정위원

2003.12.- 한국노동법학회 회장

2004,06.- 한국노사관계학회 회장 

2005.01.-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

2006.08- 노동인권회관 이사

2007.04.- 한국사회법학회 회장

2009.06- 함께일하는재단 상임이사

2009.07.- 다솜이재단 이사장

2012.01- (사) 71동지회 회장

2003.12.-  국제노동사회법학회(ISLSSL, 제네바) 집행위원

2012.09.- 국제노동사회법학회(ISLSSL) 부회장 

2014.03.- 국민대 명예교수

2017.05- (사)한국ILO협회 회장

2019.04.- (사)4월회 부회장

구술내용 요약

이광택은 대전에서 출생해서 마산, 진주, 통영, 거창, 부산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서울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집을 떠나 하숙 생활을 하였다.  이광택은 《신동아》 등 시사 잡지를 읽었고 경기고 시절 한일협정반대데모에도 참가하였다.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서는 사회법학회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69년 2학년이 되어 3선개헌반대운동에 참여하고 방학 때는 부산의 대학생과 접촉하여 학생운동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활동을 하였다. 법대 지하신문 《자유의 종》에도 관계를 하였다. 1970년 11월에 일어난 전태일분신사건은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울대 법대는 분신 소식을 듣고 사회법학회가 대책을 논의하고 학생회와 합의하여 긴급학생총회를 열고 전태일 장례를 서울법대학생장으로 하기로 결의하였다. 성모병원 영안실에 갔을 때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가 이광택을 보고 목사인 줄 알고 추도사를 청하자 문득 요한복음 12장 24절이 떠올라 ‘한 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를 암송하고 추도사를 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생 노동문제에 연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71년 교련반대운동 때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보 편집장을 하였고, 김지하·박태순 등과 팀을 이루어 영남 지역을 맡아 4.27대통령선거 참관단으로 활동하였다. 10.15위수령 발동 후 도피하던 중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보안사로 인계되어 창원 39사단으로 강제입영되었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전태일분신사건의 의미
녹취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