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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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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장기표
면담자
신동호
구술일자
2019. 8. 13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구술시간
185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서울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 서울대 법대 지하신문 《자유의 종》 발행

-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사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5.3인천민주화운동 등 연루

- 민통련 사무차장, 정책연구실장

- 전민련 사무처장

구술내용 요약

하이라이트 내용_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조직 논의

구술내용_

장기표는 어려운 집안 환경에서 자라면서 세상을 바꾸는 꿈을 가졌다. 그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법대를 기반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법대를 그만두고 가나안농군학교에 가려고 했다. 그러다 조영래를 만나 사회법학회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장기표는 군복무를 하면서 사회법학회 선후배들과 만나면서 정치사회 정세와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복학 후 《자유의 종》을 창간해 학생운동의 이론과 정세 등을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중에 전태일분신사건이 일어났다.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와 장기표는 삼일다방에서 처음 만나 서로 강한 감화를 받아 그 인연을 평생 이어갔다. 전태일사건은 조영래와 장기표로서는 학생운동을 확장하기 위한 전략적 계기로 삼아 깊숙이 접근한 사안이었다. 전태일사건은 그 뒤 김진수피살사건, 국립의료원 인턴 집단사표 사건, 한진소속 파월기술자 폭행사건 등 잇따른 노동사건과 함께 학생운동이 노동문제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교련반대투쟁과 4.27대통령선거 국면의 투쟁으로 치열했던 1971년 학생운동은 광주대단지사건, 실미도사건, 사법파동 등과 맞물려 박정희 정권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10.15위수령과 이듬해 10월유신으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장기표 개인에게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이라는 탄압으로 나타났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