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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1944년 11월 22일 미, 영, 중의 지도자들이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해방시키고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고, 포츠담 선언으로 이를 재확인한다.
그리고 45년 2월에 미, 영, 소 3개국 정상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의 분할점령과 군정실시를 합의하고,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미, 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다. 이어서 이 해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행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남과 북은 정반대의 입장 차이를 드러낸다. 북과 좌익세력은 신탁통치를 찬성하지만 남측의 중도세력과 우익세력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격렬한 대립이 전개된다. 이렇게 입장차가 현격히 드러나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지만,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을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미국은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이 논의에 참여시키자고 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만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회담은 결렬된다.
그러자 유엔에서는 한국문제를 회의에 상정하여 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지만 북측에는 소련의 반대로 이들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자 유엔은 총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유엔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48년 5월 10일에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
김구와 김규식은 단정 수립에 반대하며 총선거에 불참을 선언하고,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여하지만 역시 북한의 일방적인 회의 진행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는 곧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운형, 김규식, 김구 등의 통일 노력이 있었지만, 여운형과 김구마저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고 통일 노력은 동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5.10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여기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이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12월 유엔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에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의 격한 대립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엄청난 고통을 받아야 했으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제헌국회
총선거에 의해 의원이 선출되고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은 채 제헌국회가 열렸다.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3.1 독립정신을 계승한 민주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1948년 7월 17일 -제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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