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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적 비리

해방 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단정 수립 과정에서 민족주의 성향과 좌익계열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국내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친일 경력자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애초부터 반민족적, 반민중적 정치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폭정을 일삼으며 장기집권을 획책하게 된다.
6.25전쟁 기간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재선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제시한 대통령직선제안과 국회가 제출한 내각책임제안을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이 개헌정족수에 미달하자 무소속 의원들을 매수하고 포섭하여 개헌안 처리를 시도했다. 그 내용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철폐하고, 국민투표제를 가미하고, 내각책임제 요소를 전면 폐지한 순수 대통령책임제,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권력 승계 등을 담고 있었다. 이는 곧 자유당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 개헌안이 1표 미달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자 사사오입 원리를 적용하여 개헌안이 가결되었다고 번복하게 된다.
그리고 58년에는 2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과 겨루었던 조봉암을 간첩죄로 누명 씌워 처형하였고, 이 해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사전투표, 대리투표, 무더기투표 등 온갖 부정을 동원하여 야당과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60년 3.15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한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연일 데모를 벌였고, 교수들도 시국선언을 하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한다. 그 와중에 4월 18일 고대생들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인 뒤 귀가하는 길에 종로 5가 부근에서 정치깡패 유지광의 부하들 100여 명이 학생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은 다음날 경무대를 향하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게 되고, 경찰은 이들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바로 4.19혁명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결국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또 59년 9월 15일에는 초특급 태풍인 사라호가 한반도를 강타하여 849명의 사망 실종자가 발생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